4 과거와 미래

시즌 1 PROJECTION

by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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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이야기되는 앎은 과거에 있다. 종종 언급되는 무엇을 아는지에 관한 앎과 무엇을 모르는지에 관한 앎, 이 두 가지 앎이 현재로부터의 과거를 구성하고 있다면, 무엇을 아는지에 관한 무지와 무엇을 모르는지에 관한 무지, 이 두 가지 무지가 현재로부터의 미래를 구성하고 있을 터다. 앎이 제아무리 확장되더라도, 무수한 요소가 거듭 창조해 내는 운동 그 자체인 '미래'를 확실하게 잡아낼 수야 '당연히' 없겠다. 그럼에도 우리네 현재는 저기 저 미증유의 미래를 언제나 향하고 추론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미래를 향한 추론 그 자체가 미래에 영향을 주는 까닭에, 미래를 향한 예의 추론을 다시 자료 삼아 거듭 미래를 추론하여 욕망을 가공해 그 정확성을 기하기도 한다.

그렇게 여러 욕망들 뿐 아니라 그저 상상하는 행위 또한 미래를 향해 뻗어 있다. 온갖 가정법(~였으면 ~이지 않을까?)들이 과거를 향하고 있는 양 굴지만, 가능성의 결과라는 점에서 그 또한 과거로 짜깁기 된 일종의 미래일 텐데. 그리 가정하는 주체가 겪지 못한 '경험'을 '예상'하는 행위는, 그 시간 시점이 어느 지점을 매개하든지 경험하지 못한 걸 경험하고자 이미 경험한 것(과거)을 매개로 ('미래'를) 투사(상상)하는 행위인 까닭이다.

나아가 온갖 이론들조차, 그게 제아무리 헛된 실천이더라도 미래를 향해 뻗어 있을 수밖에 없을 모양이다. 가령 '의미 없다'는 발언조차 그 결론인 의미의 여부를 곧장 가정하여 장담하는 중이므로.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단언조차, 실상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태도를 앞으로 가지고 살 거란 장담에 불과하겠으니. 우리는 현재 우리네 상태를 진술할 때조차 그 반응을 예상하고 있다. 환자의 의학적인 진술은 곧 도래할 의사의 반응(진찰), 그렇게 마침내 타인에게 도달하고 돌려받을 언어(표현)의 뜻과 뉘앙스 등을 예상하며 그려질 테고. 그렇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문제에서조차 표현의 매개가 되는 관념의 속성이 사회적인 까닭에, 사회의 반응을 염두에 둔 약속의 체계인 언어는 실제로 사회적 반응이 피드백되었을 때에야 어느 정도 확증될 수 있겠다.

현재를 욕망한다는 단언이 이미 현재적일 수 없는 까닭도 여기 있다. 어쨌거나 무슨 작품을 창작할지라도, 우리는 관념 속에서라도 이미 고정된 구조(가령 언어)를 매개할 수밖에 없으니까. 해석 불가능한 작품을 창조하겠다는 의도 또한 '해석 불가능한 작품'이라는 산출물(미래)을 의도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해석을 쥐고 출발하는 셈이다.

따라서 스스로 미래를 욕망하지 않는다는 단언, 그러니까 '현재를 욕망한다'는 모순적인 단언은 불가능한 '결론(미래)'에 이미 도달했다고 장담하는 모양새에 불과할 터다. 그러나 이를 직면하는지의 여부를 '굳이' 빼고 말하자면, 우리의 행위 모두가 이미 불가능한 미래를 가정하고 도달하고자 애를 쓰고 있지 않던가. 최소한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현재를 살며, 그런 태도 위에서 삶을 계획하고 있지 않던가 말이다.

그리하여 불가능을 욕망하는 행위, 고로 불가능을 욕망하는 저 욕망 자체 또한 실천하고자 하는 불가능한 계획에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부분적인 요소로 포함시키는 것, 그러므로 불가능을 알고 있더라도 하염없이 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자 애쓰는 저 실천의 기원이 되는 욕망조차 당 실천의 목적 아닌 그저 자료로 다시 간주하면서야 도달할 수 있는 자리는 실상 정확한 '미래'라기보다야 '현재'에 소속된 기량의 발달일 수밖에 없으리라. 기실, 미래의 측량은 미래를 향한다기보다 당 측량을 실천하는 각자 오늘의 기량을 향해 있다. 그리고 여기서 기량은 예측 능력이 아닌 대처 능력으로 수렴되리라. 그러므로 당 기량은 아직 미래(유효성)에 있지 않다. 여기서 기량은 여전히 현재에 관한 분석에 있지만, 이를 통해 점찍는 유효성(미래)은 이후 오직 '실천(행위)'과 섞이면서야 도래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년기 자연히 가지게 되는 거울상은, 소위 말하는 상상력의 초기 도안으로써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미래를 욕망하는 기량의 최초 단계로써의 임시 목적지이기도 할 터다. 저 멀리 있는 거울상이, 영영 도래하지 못할 것 같은 꿈으로, 그렇게 아무런 노력 없이 그저 즐거운 상상으로만 남는 경우, 당사자는 그 상상 속 거울상이 붕괴할까 불안하지도 않은 그런 방치된 불가능의 경우에서 노력과는 관련 없는 불가능한 대상(미래)에의 도피적 욕망만을 가질 터다. 이 가공되지 않은 원시적 (불가능에의) '욕망'은 이제 '포기된' 욕망이자 언젠가 불가능을 욕망했었다는, 그러니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자 애를 쓴 적이 있었다는 흔적이며, 너무 먼 미래(불가능)를 노력 없이 욕망했던 까닭에 이제는 실현 없이 그저 욕망에만 안주하여 즐기고자 타협하는 그런 태도이고, 실현 과정이 두려운 까닭에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을 실천 자체보다 우위에 두고자 애를 쓰는 망각의 태도인 동시에, 어쩌면 '누구나' 성장을 거꾸로 거슬러 되감아 정신적 체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간헐적인 위로와 상상의 흔한 공간이기도 할 터다.

여기 거울상을 실현하기 위한 시행착오를 삶의 초기에 시도하면서 기량은 거울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렇게 발달하겠지만, 거울상 자체도 거기 발맞춰 실현 가능한 방식(현실)으로, 그렇게 더욱 경험-추상(초자아)적으로 변화(발달)해야 했던 모양이니. 우리는 이른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동시에 마찬가지로 누구의 현실 인식도 완전할 수 없지만, 완전한 현실 인식이 끝내 불가능하더라도 이를 얼마나 시도하여 다다랐는지를 '성숙'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숙'은 정서 발달 과정에서 현실 인식의 정도를 살피는 용어일 수밖에 없고, 그 위에서 자기 발언의 명분으로 삼고자 이런 '성숙'을 모사하고자 애쓰는 이가 '현실'에 정신을 맞추기보다 정신에 '현실'을 맞추는 방식으로 현실 부정을 하나의 어른스러움으로 포장하는 실패의 증상 또한 쉬이 설명 가능할 터다. 그는 누구보다도 성숙에 실패했던 까닭에 성숙에 동반되는 태도를 연출하는 데 종종 전문가이며, 따라서 '성숙한 태도의 연출'은 교양(정당성)으로 현실 인식(정확성)을 대리하고자 하는 대표적인 '증상'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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