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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이 Jan 27. 2023

즐거운 방황 일기

칼졸업,칼취업,대기업퇴사. 그렇게 시작된 즐거운 방황의 여정


대기업 퇴사 선언

27살.

지금껏 살아온 나의 20대는 이렇게 요약해도 되겠다.

대학교 칼졸업, 대기업 칼취업, 2년을 못채운 근무 후 퇴사.


많이들 말렸다.

가족도 말리고, 친구도 말리고, 입사동기도 말리고.

이직이 흔한 세상에서, 여느 다른 사람들처럼 NEXT를 정해놓은 퇴사가 아니었다.

취업난 속에서 첫 취준에 원하는 직무의 대기업의 합격해 덜컥 사회에 발을 들이게 된 것처럼,

그저 순조롭게 느껴졌던 스타트만큼이나 끝을 내버리는 것도 쉬웠다.


일보다 사람이 힘들어서 그런게 아니었다.

사람때문에 고통받은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입사 동기들에 비해 나만 일을 못하는 것 같았고,

멋진 커리어우먼의 모습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던 내 모습을 매일 마주하는게 힘들었다.

커리어 전문성을 키우고자 했던 나의 초심은

회사의 인사시스템으로 인해 자주 부서를 옮기며 의문으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차곡차곡 쌓여온 회사와 내자신에 대한 회의감이 어느날 터져버렸다.

정신차려보니 나는 같은 팀으로 만난지 얼마안된 팀장님께 떨리는 목소리로 퇴사를 선언하고 있었다.


시작된 방황

내가 글을 쓰는 지금 이 시점은 퇴사 후 3개월차이다.

그동안 친구들도 가끔 만나고, 가족과 부산여행도 다녀왔고,

진로를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급하게 결정하는건 무리일 것 같아 어떤 선택을 하든 도움을 줄 수 있는 토플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러면 방황처럼 보이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꿈은 하루에도 수백번씩 바뀌었다.

문과대학을 나와 이렇다할 전문성이 없는 나는

오랫동안 CPA시험을 준비해 합격한 친구를 보고 고시준비를 하고 싶기도 했고,

내가 몸담았던 대기업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외국계기업에 도전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다 교수가 내 적성에 맞을까 싶어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기도 했고,

친언니를 따라 조그마한 사업을 하고싶기도 했다.


친구들을 만나 진로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목표가 명확히 없는 내 모습과 말투에 설명하면서도 얼굴이 새빨개졌다.

여러 진로에 발을 걸쳐두고 뭐라도 하고 있으니 안심하자는 마음으로 버텨온 2개월이 한계에 다다랐다.

선택지중 어떤 것도 분명하게 열정과 의지가 생기는 목표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준비만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해외 취업에 혹하다

하지만 운도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성격상 가만히 있지 못하고 늘 조급하고 쫓기는 듯한 마음이지만 열심히 살았던 내게

마음을 울리는 한가지가 찾아왔다.


바로, 해외취업이다.


외국계기업에 지원해볼까 싶어 만든 *링크드인 계정을 통해 컨설턴트가 메신저를 이곳저곳에 뿌리다가

딱히 올려놓은 경력도, 인맥도 없는 내게 광고 메신저가 닿게 된 것이다.  

(*링크드인: 비즈니스 중심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입니다. 한국에선 주로 외국계 기업 인사팀에서 헤드헌팅하거나 신입/경력직 지원할때 링크드인을 많이 활용해요)

 

그런데 그 광고 메신저의 내용이 내 상황과 마음의 정곡을 찔렀다.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My name’s 000 and I’m a career coach for Korean professionals like you.

In the past years, I have helped hundreds of Koreans in all industries make massive improvements to their work and life.

I’m super happy to chat with you here and give you a few key tips.

Can you tell me a little bit about your career plans:    

What type of industry do you work in?

Do you have plans to move/work abroad? If yes, where?

What are you currently struggling with?

Looking forward to your feedback and I hope we can connect!

Schedule A Free Call


볼드체에 밑줄까지 쳐진 저 FREE CALL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잃을 것도 없는 미팅인데 뭐, 미국인이랑 스피킹 연습한다치고 한번 해보는거야 어렵지 않지'

해외취업이 왜 혹하지? 싶을 수 있으니 배경을 좀 더 설명하자면..

1. 영어 좀 진짜 잘해보고 싶어
 영문학과를 졸업했고, 첫회사 근무당시 직무도 해외영업이었다보니 내 일상은 언제나 영어와 함께였다. 영어로 의사소통하는걸 분명 좋아했지만, 미국/유럽에 여행으로라도 단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나는 사람들의 기대치에 비해 실력이 낮다고 생각했고, 주변의 많은 해외 경험 있는 친구들의 영어 구사력을 늘 부러워했다. (실제로 해외 파트너사와 화상회의할 때 말을 못알아 먹어 애먹은 적이 많고, 녹음본 정리는 필수였다는 슬픈 사실..)
 
2.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게 재밌어
 나는 대학생 때 교내 교환학생 몇명을 맡아 생활 적응을 도와주는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서, 세상은 넓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세상의 지평선이 넓어지는 느낌이랄까..!

3.  큰 물에서 놀아보고 싶다
 전 회사 동기가 글로벌 경쟁사와 미팅을 한 적이 있는데, 내게 미팅에서 쓰는 용어부터가 경영학 책에 나오는 용어이고 애티튜드가 나름 국내 대기업인 우리랑도비교가 안된다며 자신은 꼭 큰물에서 놀거라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성장하기 위해선 큰 물에서 놀아봐야 한다.

4. 안정을 추구하는 나이가 되기 전에 도전해보자
 시간은 갈수록 빠르게 흘러가고, 부정할 수 없는 20대 후반이 된 나는 지금 아니면 해외취업 도전같은걸 못해볼 것 같았다. 그땐 한국에서 이미 기반을 잡았을 수도 있고, 지금보단 잃을게 많기 때문이다.

해외 취업을 결심하다

미팅으로 만난 컨설턴트는 생각보다 전략적이고 자신감넘치는 세일즈맨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고액의 컨설팅을 제시하지 않았다.

토플공부를 병행하며, 남는 시간에 링크드인 활용법 관련 소액의 강의만 들어보라고 권했다.


꽤나 많았던 강의를 열심히 듣고 강의에 나온대로만 링크드인 프로필을 꾸며보았는데

한국내 외국계기업 헤드헌터 2곳에서 연락이 왔고,

그 중 한곳은 연봉과 사내 분위기, 구성원 인터뷰 등을 서칭했을 때 꽤나 매력적인 곳이었다.

 

강의를 들으면서, 그리고 그 컨설턴트를 통해

나보다 영어를 잘 못해도 유럽 각지 취업에 성공한 한국인들의 인터뷰를 보면서 해외취업에 더욱 꽂히게 되었다.


사실 평소에 해외취업은 현지인과 경쟁이 안되니까 문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전 회사 동기 중에 7년을 유럽에서 살았던 동기가 있었는데, 영어도 원어민 수준으로 잘하는 그조차도 해외취업은 MBA가 아니면 현지인에게 밀려 취업이 거의 어렵다고 말해와서 그 말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아, 영어를 이렇게 잘하는 사람도 해외 취업은 어렵구나.'


한국에서 해외취업을 준비할 때 가장 큰 리스크인 비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어권 국가인 영국과 캐나다 워홀도 신청해놓았다.


돌연 독일 한달살기  

워홀은 2개 국가 모두 떨어졌고,

컨설턴트가 제시하는 full-course 금액은 사회초년생인 내게 꽤나 큰 금액이었다.

그래도 내 의지는 강했으니까 결제할 의향은 당연히 있었고,

단지 결제 전 금액의 적정성을 가족에게 물어보았다.


그때였다.

엄마도 아니고 언니가 쌍수들고 반대했다.

역정을 내면서 반대를 해서 가라앉히고 그 이유를 듣자 하니


"너가 지금 하는 행동을 비유해볼게.

다이버가 2명이 있어.

A는 책상에 앉아서 바다의 깊이,다이빙 자세만 완벽하게 이론적으로 공부했고 B는 이론은 모르겠고 일단 직접 바다에 가서 다이빙을 하고 있어. 누가 다이빙을 더 잘할까?

너가 1명의 다이버만 고용해야 한다면 누굴 고용하겠니?"


즉, 모든 일엔 단계가 있는 법인데

외국에서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한국에서 책상에 앉아 해외취업을 준비하는 나는, 현지 맥도날드에서 감자튀김을 튀기는 알바생보다도 취업가능성이 낮은 것이다.


너무 맞는 얘기였고, 말그대로 반박불가였다.

그래서 난 선언을 한다.

"그래, 한달이라도 혼자서 살아보고 올게. 어디든.

그후에도 내가 컨설턴트 껴서라도 해외취업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면, 한 달 후에, 그때 컨설팅 받을게."


그렇게 여러 조건을 생각해 결정하게된, 독일 베를린행.

나는 지금 인생의 새로운챕터를 눈앞에 두고 있다.



즐거운 방황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방황일기를

"즐거운" 방황일기로 칭하기로 했다.


사회가 짜놓은 게임 안에서 그럴듯하게

모두들 하는대로, 있어보이는 길을 따라가다보면

그 끝에 "내자신"이 없다.

 

삶을 꽉 차게, 행복하고 자신감 넘치게 살아가려면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한데

문제는 우리가 살아온 보통의 한국사회에서

'나'는 누구이고,'나'는 무엇을 좋아하며, '나'의 삶의 가치관은 무엇인지 찾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내 앞에 펼쳐진 선택지들은 내 선택이 아니라,

획일화된 사회와 안전한 틀안에 갇힌 사람들이 내놓았던 선택지였을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대기업을 그만둔 것도, 내가 모아놓았던 돈이 언젠가 다 떨어져도, 남들 보기엔 실패로 끝나도 괜찮다.


올바른 방황으로 더 단단해진 나에게,

삶은 나를 더 행복한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내 앞에 놓인 인생의 새로운 챕터도

나의 크고 작은 노력들이 모여,

학점을 잘받기 위해 수없이 걱정하며 날을 샜던 밤들과

스트레스로 다이어트하며 이겨낸 회사생활이 안겨준 돈이 모여,

그렇게 만들어진 소중하고 감사한 길이다.  


모든게 우연이고 충동으로 이루어진 것만 같은 지금의 방황은

사실은 오랫동안 품어왔던 내자신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해보고,

자주 미워하곤 했던 내자신을 용서하고, 나도 몰랐던 내자신을 알아갈 여정이기에

너무나 유의미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이다.


독일에서의 방황일기는 그런 의미에서 매일매일 작성하려고 한다.  

뾰족한 수가 눈앞에서 날 기다릴거라고 생각했지만

뾰족한 수도 내가 만들고 다듬어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깨달은 지금,

나의 즐거운 방황일기의 길고 긴 서론이 끝났다.

얼마나 길고 깊은 본론이 날 기다릴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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