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삶, 그리고 행복'에 관한 고찰
'일과 삶 그리고 행복'이라는 주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을 시작했던 시기는 30대가 되고, 스타트업 씬으로 들어오고, 그리고 코로나가 시작되고 나서였다. 그전엔 일과 삶을 분리해서 보는 '워라밸'의 관점이 우세했던 시대였고, 스타트업 대비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외국계기업으로 대면 통근하던 시절이라 출근과 퇴근 이후의 삶이 어느 정도 구분되어 이 주제에 대한 고민은 딱히 크게 하지 않았었다. 20대였고, 회사에서 비교적 주니어에 속해 선배들로부터 우쭈쭈 받던 시절이기도 하다. 이때의 나는 퇴근 무렵이면 일에서 벗어나서 얼른 나의 삶으로 퇴근하자는 생각으로 가득했고, 일로 만난 사이와 개인 삶에서 만난 사이를 구분했으며, 나만의 취미와 커리어를 위한 자기계발을 확실히 분리할 수 있었다.
30대가 되고 스타트업 씬으로 들어온 후, 그리고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상황들을 마주치게 되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스타트업에서 몰아닥치는 일 그리고 리더/시니어 역할에 주어지는 책임과 함께 성취감과 희열을 느끼는 나 자신을 바라볼 때. 출퇴근이 구분되지 않는 원격근무의 세계에서 기존의 루틴이 파괴되고 새로운 루틴이 쉽게 생기지 못하는 것을 인지했을 때. 업무 영역을 둘러싼 다양한 사람들과의 네트워크가 넓어지면서 이게 업무적 관계인지 아니면 개인적 관계인지 헷갈리기 시작했을 때. 예전이었다면 커리어를 위한 자기계발임이 분명한데 어느새 내 일상 속으로 들어와 취미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리고 어느 순간 번아웃이 왔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30대 이전과 이후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그제야 '일과 삶 그리고 행복'이라는 주제에 대해 본격적인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워라밸' 열풍부터 최근 많이 언급되고 있는 '조용한 사직'까지. 보통은 [일 vs 삶]의 관점,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일 vs 삶의 '행복']이라는 분리적 관점에서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고, 기존의 나에게도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관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의문이 생겼다. 어쩌면 나는 이 분리적 관점 때문에 번아웃이 온 게 아닐까, 나를 포함 모든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 핵심은 이 둘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일'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다. 이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고민도 꽤나 많았을 것이다. 삶 속에 일이 있고 일을 통해 삶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데도 그것을 인지하고 이루어 내는 과정이 쉽지 않기 때문에, '아니야, 이 둘은 합칠 수 없어. 행복하게 일하기는 어려워'라는 합의(혹은 전제)가 생겨 결국 [일 vs 삶] 혹은 [일 vs 삶의 '행복']과 같은 분리적 관점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원래 적이 있어야 탓을 하기 좋고, 또 에너지도 생기는 법이니까 말이다. 덧붙여 이 분리적 관점으로 인해 '일'을 내 개인 '삶'을 위한 돈벌이 수단으로 치부하는 현상까지 생기면서 둘 간의 간극이 더 공고하게 되었을 수도. 물론 거기엔 꼭 우리가 전통적으로 '일'이라 불러왔던 것들을 하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는 수단들이 다양하게 등장하여 일반화된 상황 역시 한몫했을 것이다.
이렇게 혼자만의 추론을 하며 나의 고민은 자연스럽게 '그러면 앞으로의 나의 삶, 일, 그리고 행복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에 대한 나만의 해결책은 나를 둘러싼 모든 이슈상황들을 굳이 '일' 혹은 '삶'이라는 카테고리로 구분하지 않고, 모든 것들이 각각의 퀘스트라고 인식하며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즐거움과 보람을 얻자는 것이었다. 결국엔 그 '분리'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굳이 분리하지 않으면 될 것이었다. 일, 여가, 배움, 사회관계, 가정생활 등이 모두 혼재된 상황에서 생기는 다양한 이슈들을 각각의 퀘스트로 생각하고 해결해 가는 즐거움에 집중할 때, 그리고 특히 어려운 퀘스트를 통과했을 때, 타인의 영향은 완전히 배제된 오로지 나의 내면에서 느끼는 그 짜릿함과 뿌듯함이 결국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가정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가정은 지금까지 잘 들어맞고 있다. 일을 포함한 나의 삶 전체에 대한 몰입이 높아지고 평소였다면 부정적으로 반응했을 것들이 전혀 중요해지지 않는달까.
내 퀘스트는 굉장히 다양하다. 업무 문제 해결을 위해 관계적 노력을 포함한 다방면의 전략을 고민하고 실제로 실행해서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퀘스트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생산적으로 잘 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제로 정말 잘 쉬는 결과를 만드는 퀘스트. 갖고 싶은 아이템을 가장 저렴하게 가성비로 구매하는 퀘스트. 함께 성장하는 기쁨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팀문화를 만들고 보람된 과정뿐 아니라 의미 있는 결과를 같이 만들어 가는 퀘스트. 가족 혹은 친구 사이에서 사소한 다툼을 잘 중재해 즐거운 여행을 만드는 퀘스트. 내가 생각하기에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부정적 행동을 수정하는 퀘스트 등등. 그리고 중요한 건 이 모든 것들에 소진되지 않도록 나 자신을 돌보는 퀘스트를 꼭 포함한다는 것. 각 퀘스트를 돌아가면서 집중하고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겪다 보면 특히 내적 행복이 나날이 커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론 모든 퀘스트를 통과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지만, 그 과정에서 실패가 거듭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지금 나에겐 너무 버거운 퀘스트라 일단은 접고 중도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러한 퀘스트에 대해서는 스스로 회고하고 다시 시작하거나, 아니면 다른 형태의 퀘스트로 옮겨 지난 교훈을 바탕으로 새롭게 적용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중단하지 않으면 나의 행복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퀘스트는 과감히 포기하기도 한다. 이 퀘스트 여정은 오로지 나의 의지로 컨트롤해나가는 것이고, 내가 아닌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영역이라 부담도 훨씬 덜하다. 하나의 퀘스트가 안 풀린다고 해서 내 모든 삶이 끝난 것 마냥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된다. 이 퀘스트들의 총합이 내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 하나의 퀘스트가 내 삶 전체를 결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되면 되는 거 하면 되니까!
그래서 일을 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과 삶의 구분 없이 나에겐 다양한 퀘스트들이 있고 이를 통과했을 때의 짜릿함과 뿌듯함이 내적 행복을 만들어 낸다는 메커니즘으로 살아간다면 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일을 하며 얻는 행복을 중요시하는데, 본인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그 일에서 성취와 보람을 얻는 것이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에게 이 메커니즘은 일을 통한 삶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고 번아웃을 컨트롤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본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가치와 행복의 원천은 모두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꼭 모든 사람이 본인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며 행복을 느껴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메커니즘은 도움이 될 것이다. 설사 돈벌이만을 위한, 나에게 의미가 크지 않은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이를 내 삶에서 적으로 보지 않고 나의 삶 전체 중의 하나의 퀘스트로 인식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이 지점에서 '워라블(Work-Life Blending)'과는 조금은 다를 수도.
어떤 종류의 일을 하든, 모든 이들의 삶이 행복하길 바라며.
위 글과 관련하여, 연세대 장원섭 교수님의 '일의 행복과 장인성'이라는 글에서 깊은 인사이트를 얻었다.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신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