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10부작씩 총 2개의 파트로 나뉘어 진행되는 드라마 <연인>의 파트1이 현재 MBC에서 방영되고 있다. 중반부를 넘어 6부작까지 방영된 현재, 필자가 느끼기에 이 드라마는 사랑받아 마땅하다. 제작발표회와 여러 홍보 영상들에서 언급했듯 그 이유에는 빼어난 영상미, 남궁민 안은진을 비롯한 믿고 보는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 흥미진진하면서도 밀도 있는 전개, 전쟁을 비롯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교차하는 다양한 감정 등등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본방송을 챙겨 보고 있는 필자가 느끼기에, 이러한 이유들은 단순한 홍보 문구가 아닌, 진정성 있는 고민의 결과로 다가왔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드라마가 사람에 대한 고민을 정말로 따뜻하게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의 매력을 나열하자면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으나, 이 글에서는 드라마가 ‘사람’을 그려내는 방식의 일부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1. 전쟁 속의 삶 - 죽음 어린, 그러나 살아 있는
역사드라마에서 전쟁 장면을 본 적이 있냐고 묻는다면, 아마 당장 수십-수백 명의 군인들이 서로 칼을 휘두르고 피가 흐르는 전투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단역 배우들이 픽픽 쓰러질 때, 주인공은 멋있게 전투에 임하다가 (어쩌면 팔이나 다리를 살짝 다칠 수도 있지만) 또 승리하여 당당하게 길을 나선다. 전쟁의 참상은 클리셰처럼 잠깐 시청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가 금세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평생 글만 쓰던 연준 도령이 그 외모와 말솜씨가 믿음직스럽다 하여, 휘둘러보지 않은 무기에 대한 감각까지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을 리가 없다. 의기에 찬 연준도령과 콧대 높은 길채가 무엇을 상상했든, 전쟁은 그것과는 다르다.
비단옷을 입고 꽃놀이를 하던 시기에도 이장현이 계속해서 경고했던, ‘전쟁이 무엇인지 정말 안다고 생각하느냐’는 말들은 곧 실전으로 울려 퍼진다. 장군 밑에서 멋있게 싸우다 죽으려 했던 연준 도령은 전쟁에 임하려는 마음의 준비를 채 하기도 전, 자기 앞사람의 피를 맞는다. 전투는 제3자의 시선에서 안전하게 비치지 않는다. 카메라는 겁에 질린 연준도령의 시점으로 그 혼란을 담아내며, 허무하게 쓰러져 눈이 자꾸 감기는 개인의 희생을 시청자들이 느끼도록 한다. 이장현과 다시 만났을 때 연준 도령은 온 얼굴이 피와 때 범벅이 된 채로, 겁에 질려 벌벌 떤다. 전쟁에서 누군가는 공을 세우고 승승장구했겠지만, 아마도 수많은 백성들은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만큼 몹시도 겁을 먹었을 것이다. 연준도령의 첫 전투는, 평생 누군가를 죽여본 적 없는 이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전쟁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섬세한 시선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전쟁의 참상에 이입할 수 있는 <연인>의 설정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한, ‘연인’이다. 왜 드라마의 제목에는 전쟁이 드러나지 않는가. 잠시 드라마 속 연준 도령의 주요 역할이 무엇인가 생각을 해보자. 물론 나라를 위해 열심히 싸우는 유생으로서의 모습도 그의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이겠으나, 주인공 길채와 이장현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그는 길채에게는 연모하는 대상이며 이장현에게는 길채와의 사랑을 가로막는 거슬리는 존재이다. 주인공들을 중심으로 드라마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입장에서, 연준 도령이 영락없는 의병의 모습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최선을 다해 싸우는 모습이 계속해서 나타나더라도, 시청자들은 그를 단편적으로 ’충직한 병사‘로만 보지 않고, 그가 ’길채가 사랑하지만 은애와 혼인할 예정인 능군리의 유생‘이었음을 끊임없이 기억하며 볼 것이다. 즉, 드라마 속 그들은 전쟁을 겪고 있지만, 그들이 현실의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이 사랑을 하고 우정을 나누는 ‘사람’임을 잊지 않도록 하고 있다. 전쟁에 참여한 이들은 원래부터 전쟁에 참여하고 전장에서 죽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연인>은 전쟁의 참상에 대해 현실적인 시각을 담아내면서도, 그 안의 인물들이 각자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사랑을 해왔으며 인간관계를 만들어 왔는지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이 등장인물과 감정적으로 보다 가깝게 느끼며 이입할 수 있는 효과를 불러온다.
연준 도령의 예시를 주로 들었으나, 물론 길채와 장현의 이야기에서도 전쟁에서 교차하는 삶과 죽음이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털신을 신고 죽은 시체 앞에서, 길채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살기 위해 그 신발을 벗겨낸다. 또 배를 태워달라며 종종이의 치맛자락을 붙잡는 여인의 손을 단도로 사정없이 찍어 뿌리치기도 한다. 길채는 주인공이니만큼 극적으로 강화도를 탈출하고 절체절명의 순간 장현의 도움을 받지만, 배를 타지 못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모두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며, 절벽에서 스스로 뛰어내려야 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완벽한 영웅 같은 이장현은 적의 진영에 들어가자마자 발톱이 뽑혀 피가 흐르는 끔찍한 고문을 당하며, 동물의 피를 마시고 천연두에 걸릴 위험도 감내해야 한다. 길채 옆에 꼭 붙어 있고 싶겠으나, 휴대폰도 없던 시절 피난 가는 그녀에게 그가 줄 수 있는 것은 작은 칼 한 자루밖에 없다. 이장현이 중시하는 것은 국가나 절과 같은 거창한 도덕이 아니라, 따뜻한 아랫목, 소중한 몇몇 이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이다. 그는 대의를 비웃더라도 민중의 목숨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길채와 장현은 역사에 휘말리기는 하나 대체할 수 없는 한 인간으로서 사랑을 키워가는 와중 전쟁을 생생하게 겪고 죽을 고비를 넘긴다.
이처럼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장현의 삶의 태도, 구체적으로 ‘생존’해나가는 길채의 모습, 그리고 위와 같은 단편적이지 않은 전쟁통의 삶을 만들어가는 드라마의 연출과 각본이 모두 한데 어우러져, 드라마 <연인>은 커다란 전쟁을 그려내면서도 ‘사람’과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이 드라마가 현실감 있게,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런 점이다. ‘사람과 삶’을 그려나가는 이 방식이, 회차가 거듭될수록 시청자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드라마 <연인>의 매력이 아닐까.
2. 밑바닥을 까고 시작하는 ‘섬’
진지한 듯 장난스러운 듯 능청맞은 이장현의 모습은 천하의 유길채도 갈피를 못 잡을 만큼 매력이 넘친다. 이 둘이 둘만 모르는 사랑싸움을 할 때 시청자들은 흥미진진함을 느낀다. 단순히 설렘을 느끼게 하는 것을 넘어서는, 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한 쌍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중 하나는 아마 두 캐릭터가 ‘밑바닥을 까고 시작한다’는데 있을 것이다.
길채와 장현이 서로 투닥거리면서도 사이가 멀어지지 않고 둘만의 케미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서로에게 솔직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솔직함’의 첫 번째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 있다. 그들의 대화에서 대체로, 장현은 장난을 한 스푼 섞은 진담을 툭툭 건네며, 길채는 이 말에 당당하게 맞서 본인의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내뱉는 모습이 드러난다. 그는 은애와 연준 도령이 혼인을 앞두자 슬퍼하는 길채를 보고서는, 자신이 지닌 무기를 내어주며 능군리의 혼인을 막는다. 그런데 그는 길채를 찾아가 자신이 어떻게 이 혼인을 막았는지 주절주절 늘어놓지 않고, “뭐 나한테 줄 거 없소? 감사의 표시라든가.“ 라며 넌지시 생색을 내며 장난을 건다. 길채는 이런 상황에서 마음에도 없이 과하게 예의를 차리거나 머리를 굴리지 않고, 곧바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립니까?”라며 받아친다. 길채는 평소 이장현에게 그를 ‘못생긴 돌덩어리’로 생각하고 있음을 거침없이 내뱉고, 이장현은 그런 길채 앞에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낭자의 귀한 입술 한 번 주시오”와 같은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을 건네며 길채의 성질을 돋운다. 각자 체면을 지키며 점잖게 다가가기보다, 능글맞은 ‘비혼주의자’와 당찬 ‘여우 아닌 여우’가 있는 그대로, 생각하는 그대로 툭툭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시청자들의 가슴을 간질간질하게 만든다.
그들의 두 번째 밑바닥은, 전쟁이다. 두 사람이 고운 얼굴에 깨끗한 옷을 입고 만나는 장면은 오래 가지 않는다. 피난길에 만난 길채와 장현은 얼굴이 얼룩덜룩 시커먼 색이며, 머리는 부스스하고 옷도 흙투성이다. 주인공들은 예쁘게 한껏 꾸며 잘난 체 할 여유도 없이, 꾀죄죄한 몰골로 서로 만난다. 비록 서로 곱고 여유로울 때 만났으나, 그들의 인연은 단지 찰나의 사랑놀이가 아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몰골이 어떻든 살아서 만난 것에 대한 반가움을 먼저 느낀다. 장현은 길채가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소리가 달다고 느낀다. 전쟁으로 한치 앞날을 모르는 시기, 아름다운 달빛 아래 땟물이 흐르는 얼굴을 맞대고 ‘섬의 시간을 갖는 것이 어떻겠소?’라며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은 코믹하지만 진지하다. 전쟁 속에서도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만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두 사람의 사랑이 귀여우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다고 느껴진다.
마지막 ‘솔직함’은 두 사람이 서로를 믿고 위하는 마음이다. 장현은 길채에게 대체로 능글맞게 장난을 치며, 길채는 장현에게 버럭 소리를 치는 편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하는 마음도 숨기지 않는다. 길채는 부상병들을 치료해주는 곳에서 장현과 작은 말다툼을 벌인다. 길채는 “야!”라고 소리치고, 장현은 “나는 너보다 나이도 많아!”라고 외친다. 하지만 길채는 곧, 돌아서는 장현의 팔에서 떨어지는 피를 본다. 그녀는 장현과 방금 싸웠지만, 그 순간 자존심이고 뭐고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그를 불러서는 다시 붕대를 묶어준다. 그녀는 또한 장현의 ‘달빛에 대한 맹세’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굳세게 강화도로 피난을 가기도 한다. 6회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완전한 확신 없이도 장현이라 추정되는 인물을 만나기 위해 다시 뒤돌아 적들에게로 뛰어간다. 장현이 길채를 생각하는 마음과 그녀를 지키려 기꺼이 싸우는 장면은 너무 많아 다 언급하기 힘들 정도다. 그는 “이런 젠장”이라고 말하면서도 결국 어느 순간부터 언제나 길채를 위한 길을 달려가고 있다.
아직 제대로 된 연인도 아닌데 길채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장현이 비현실적이라 느껴질 수도 있다. 길채의 말 한마디에 안절부절못하는 유생들의 모습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길채와 장현이 자신들을 어떤 사회적인 틀, 체면, 가식 속에서 포장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귀여운 말다툼을 벌이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 보면 어느새 그 안에 빠져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몹시 솔직하고, 어쩌면 순진하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대화와 몸짓을 주고받는다. 신분, 출신, 전쟁 등등 그 어떤 조건도 상관없이 두 사람만이 있다. 이들의 모습은 혹시, 관계는 얇아지고 진심은 숨긴 채 ‘신뢰’라는 말이 어렵게 다가오는 요즘 사회와 대비되지는 않는가. 두 사람의 순수한 만남은 어떤 사랑을 걸어갈 것인가, 자꾸 지켜보고 싶어진다.
드라마 <연인>에서는,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과감 없이 보여주는 한편, 역사라는 거대한 이름에 묻힌 개인의 절절한 이야기들을 발굴해 내려는 섬세한 노력이 느껴진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날 때. 이 드라마가 어떻게 ‘사람’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또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는지, 점점 더 몰입하여 흥미롭게 지켜보게 된다. 드라마 <연인>이 앞으로 빚어나갈 고유한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