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겸직
제 5 공화국이 막이 올랐다.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이후 헌법 개정을 통해 탄생한 대한민국의 다섯 번째 공화국이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고 그 당시 영부인이었던 이순자의 특수 시책으로 '병설 유치원'을 국민학교에 개설했다.
국민학교병설유치원은 1980년대에 초등학교 내에 부설된 공립 유치원으로, 유아교육의 공적 기반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1985년 이후 여러 지역에서 국민학교병설유치원이 인가되어 개원했으며, 이는 지역 유아교육의 내실화와 공교육 기반 조성을 목표로 했다.
1980년대에는 국민학교 교사가 유치원 교사로 겸직하는 제도가 도입되어, 교사 수급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80년대 병설 유치원은 국민학교 교실과 시설을 공유하며, 주로 만 3~5세 유아를 대상으로 운영되었다.
우리 학교에도 병설 유치원이 개설하였다.
문제는 교사였다.
여교사 2명 중 선배님은 완곡한 거절 의사를 표명했기에 기회 아닌 기회는 나에게 돌아왔다.
겨울 방학 동안 10일 동안 설악산 유스호스텔에서 전국에서 차출되어 온 교사들이 합숙을 했다.
10일의 합숙 연수를 마치자 '유치원교사 2급 자격증'을 주었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기였다.
오전에는 2학년 담임을 맡다가 오후에는 유치원 선생님이 되었다.
정확한 이유는 지금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교감선생님이 2학년 수업을 2시간 해 주셨다.
그리고 유치원 겸직 수당 거금 6만 원을 정확하게 반띵해 드렸다.
나의 의견은 아닌 것은 확실한데 어찌어찌 교감선생님에게 피 같은 수당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그 당시는 아무것도 모르고 하라는 대로 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무척 황당하고 속이 상했다.
그 당시 3만 원은 꽤 큰돈이었다.
다 해 봤자 6만 원이지만 월급이 20만 원 초 일 때이니 적은 돈은 아니었다.
벼룩의 간을 아주 제대로 뽑아 드신 것이다.
유치원 유아들과의 수업은 너무 재미있었다.
아이들이 등원할 때 교문에 나가서 아이들을 맞이했다.
삼천궁녀를 거느린 의자왕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아이들은 나의 양손은 물론이고 치맛자락이라도 잡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야말로 아이돌급 인기였다.
늘 유아들에게 둘러 싸여서 거닐고 있는 나를 보고 평소 작명에 일가견이 있는 선배가 '의자왕'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귀요미들.
하지만 늘 안전 사고에 대한 위험에 노출되었기에 초긴장 상태였다. 게다가 교구가 부족했기에 수업 자료나 아이들 활동거리를 준비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도 교실문만 열고 나가면 천혜의 자연이 놀이터가 되어 주었고 모래사장에만 가도 온종일 놀아도 시간이 짧았기에 아이들과 함께 행복했다. 기껏해야 병뚜껑이나 빈 상자로 모래 놀이를 하던 아이들에게 알록달록 예쁜 모래 놀이 기구를 던져 주니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의 눈은 반짝거렸다.
아이들의 행복도에 반비례하여 나의 학교 생활은 동동거림의 연속이었다. 안 그래도 소인수 학교라 교사의 업무량이 많았는데 유치원 사무까지 맡으려니 몸이 세 개쯤 되어야 한숨 돌릴 상황이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난방은 했지만 바닥은 차가웠다.
남자 아이가 복도에서 냅다 달리다 넘어졌는데 차가운 바닥과의 마찰로 얼굴과 손이 많이 다쳤다.
피가 철철철 흐르고 아이는 죽는다고 넘어가며 울어재끼고 나는 완전 멘붕이 왔다.
학교 아저씨의 오토바이를 타고 10분을 달려 면 소재지의 보건소로 달렸다.
이마가 1센티미터나 찢어졌기에 피가 많이 흐른 것이었다.
응급처치로 피를 멎는 것을 보는 순간 내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너무 놀라고 긴장한 상태로 추운 겨울에 오토바이를 타고 온 데다가 갑자기 따뜻한 실내로 들어오니 열이 확 뻗쳤다. 아이의 안위를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풀리고 눈이 풀리고 다리가 풀려서 정신을 깜빡 잃은 것이다.
난생처음 기절이라는 걸 했다.
아이와 함께 나란히 침대에 누워서 손을 꼭 잡았던 기억이 낡은 책표지속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