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이지만 무기력하지 않고, 게을러지지 않기 위해 나름의 루틴을 계획했(었)다. 오전 8시에 일어나, 오후 12시에 외출을 하고, 오후 6시쯤 귀가를 하는 야심 찬 계획. 그러나 첫날부터 변수가 생겼다. 새벽 4시까지 넷플릭스로 달린 것이다. 저녁에 커피를 마신 것이 화근이었다.
새벽까지 깨어있었으니 아침에 눈에 떠진다 한들 비몽사몽 했다. 오전 8시에 일어나려던 계획은 보기 좋게 틀어지고, 11시까지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아점으로 간단하게 김밥 몇 개를 주워 먹으면서 정신을 깨웠다.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애정하는 카페에 소금빵이 막 나왔다는 피드를 봤다. 맛있겠다! 빨리 샤워하고 나가야지!
카페에 가서 오늘의 브런치를 쓰고, 과제 초안을 잡아보려고 노트북을 챙겼다. 강아지랑 뚱땅뚱땅 공원을 가로질러 카페에 도착했는데 두 번째 변수가 생겼다. 카페가 만석이었던 것이다. 할 일을 바리바리 챙겨 왔지만 예약해 둔 소금빵과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서 그대로 집으로 돌아올 판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세 번째 변수. 자리가 나려나 카페 밖에서 두리번거리는데, 어떤 사람이 카페 안에서 유리창을 톡톡 치며 나를 불렀다. 우리 강아지 미용쌤이 계셨던 것이었다. 앉을자리를 내어주셨는데 얼떨결에 합석했다. 사람 셋, 강아지 넷. 반려인들이 모이면 공통의 관심사 덕분에 수다가 끊이질 않는다. 오늘은 가을이란 강아지를 처음 만났는데 겁은 많았지만 참 온순하고 사랑이 많은 강아지였다.
그렇게 강아지들이랑 노느라 6시까지 노트북은 꺼내보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 집에 돌아오면 우리 강아지 목욕을 시켜주려고 했는데 뭘 했다고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목욕은 내일 하자... 조금 쉬다가 주방으로 나와 내일 먹을 계란샐러드를 만들고, 밀린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아침에 남은 김밥을 파기름을 내고, 액젓을 살짝 더해 볶음밥으로 만들어 저녁으로 챙겨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밤 11시 30분. 낮에 못 쓴 브런치 오늘 안에 발행하지 못할까 봐 바쁘게 타자를 치는 중이다.
오늘 계획대로 된 건 0에 수렴한다. 그럼에도 그 많은 변수와 우연이 만나 나의 하루를 만들어주었다. 순서는 뒤바뀌었지만 결국 소화해 낸 일정도 있었다.
한편으론 백수가 되니 시간감각이 둔해지는 것 같다. 당장 어제 뭐 했는지도 스토리를 봐야 생각이 난다. 매일이 토요일 같아 더욱 나른해진다. 난 내일의 토요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요즘 바깥활동이 너무 많았으니 내일은 집에 있어야겠다. 이 또한 계획 변경이네. 정말이지 계획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