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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보 Feb 01. 2023

삶의 지속성이라는 비극과 희망

사는것을 포기한다고 삶이 멈추지는 않는다.

사는 것을 포기한다고 삶이 멈추지는 않는다.


 삶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 삶을 멈추고 싶은 사람은 많다. 그러나 삶에는 쉼이 없다. 멈춤이 없다. 어떤 순간에도 삶은 지속된다. 그 비극과 희망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단적인 예로, 삶을 잠시 멈출 수 있다는 것은 시간이 흐르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삶이 멈춘 거 같은 순간들이 있을 뿐이다. 삶은 간혹 주체인 '나'를 두고 혼자 멀리 가버릴 때가 있다. 이런 경험을 자주 맞이하게 되면 이 삶을 내가 사는 것인지, 삶은 진행될 뿐이고 내가 아등바등 쫓아가는 것인지 헷갈린다. 삶 속에 내가 있는 것은 누가 봐도 명확하나, 모순되게도 내가 보기엔 삶에 '나'는 없는 것이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사는 삶은 흩뿌려져 있는 연기와 같다. 잡으려야 잡을 수 없는 신기루이다. 형체가 있긴 있으나 구체화할 수 없다. 심지어 그나마 있는 형체는 사소한 바람에도 시시각각 바뀐다. 아주 연약하다. 그렇기에 타인에게 나의 인생을 보여줄 수도,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은 그저 연기이기에. 그보다 힘든 것은 자신마저 그 실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 말하길, 삶은 한 권의 책과 같고, 한 장의 지도와 같다고 한다. 아주 멀리서 인생을 반추해 보았을 때 누구나 그럴 것이다. 시작과 끝이 있고, 밟아온 족적이 있고, 삶은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으니, 마지막 장이 쓰일 때까지 이어지는 책처럼, 죽음이라는 공통된 도착지까지 이어지는 길처럼. 삶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순간이 아니, 그것은 너무 길다. 꽤 많은 시간의 생이 신기루와 같다면 그것은 인생이라는 책에서 몇 줄의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수십 년을 살아도 그것이 연기와 같다면 책에는 한 장도 채 못 되는 몇 줄의 글만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그것을 알아차린다 해도 벌써 그 생은 지나갔다. 꽤 오랜 생이 고작 몇 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당혹감으로는 무엇도 바로잡을 수 없다. 크게 쏟아지는 긴 세월의 하나뿐인 당혹감을 온전히 맞아야 할 뿐이다.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는 꽤 까다롭다. 그뿐만 아니라, 충격적인 감정은 반복적으로 필자를 찾아온다. 


 삶을 어느 정도 포기해 보면 더 명확하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다. 나는 아직 서른이 안 된 젊은이인데, 내 인생의 반은 명확한 주체인 '나'로서 살아왔고, 인생의 반은 삶은 지속되지만 '나'는 그 무엇도 진행되지 않은 채 살아왔다. 나의 나이를 서른으로 치자면, 탄생부터 15살 전까지, 15살부터 30살까지 그러했다. 여러 해 동안 죽네 사네 했으나 스스로와 단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어찌 되었든 죽지는 않기로. 이 삶을 다 살아내기로. 이 결심을 하기 위해서는 다시 몇 가지 합리화적 약속이 필요했다. 숨어 살아도 살아낼 것을, 힘들면 도망칠 것을, 비참하고 찌질해도 얄팍하게나마 연명할 것을 약속했다. 그래서 나는 죽지 않을 정도로만 살아왔다. 

 내게 없는 것을 묻는다면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잃은 것이 너무 많아서 답할 수가 없고, 답하는 것은 내 인생의 비참함만 가중됨으로 더 답할 수 없겠다. 나에게 있는 것을 물어보자면 답할 수 있었으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답할 수 없게 되었다. 가령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집에 살고 있으나 그 집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듯 물질적인 것이나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경력이나 스펙의 것들을 물으면, 그것은 없는 것에 속하기에 있는 것에는 답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나마 내가 가진 것은 무엇일까. 육신과 영혼, 살아온 행복하고도 고통스러운 과거, 미래가 희망차길 바라는 망상과 집중하지 못하는 현재. 그뿐이다. 다행히 그 와중에 대학 졸업장은 땄으나, 학교에서 제대로 배워 흡수한 것이 없으므로 그 또한 내 것이라 할 수 없다. 인생의 반 동안 내가 경험한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내가 경험한 것은 외로움과 고립, 슬픔과 공허, 좌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감정은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그러한 것들을 오래, 자주, 깊이 느꼈기에 구체화 되어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삶은 주체를 잃어 연기와 같이 미약한데 위의 감정은 삶보다도 명확하며 단단하다. 그렇다면 내 삶의 절반은 '나'가 살아온 것이 아니라 위의 감정들이 주체로서 객체인 '나'를 끌어온 것일까. 자신의 삶에 손님으로 작게 존재하는 일은 내가 '나'로서 인생을 살아왔다고 말 할 수 있는걸까. 온전히 감정만을 느끼며 산 세월이 삶의 해상도를 높여 줄 수 있을까. 


 삶은 증명의 연속이다.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해야 하고,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 얼마나 능력 있고, 쓸모 있는 인간인지를 증명해야 한다. 약육강식은 자연의 섭리이다. 약한 자는 잡아먹히고 도태된다.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지 못하는 인간은 자연에 내포된 인간이 설계한 인위적인 생태계 속에서 추락한다. 이 생태계 속의 자멸을 정말 자멸이라 확신할 수 있을 것인가. 날개 달린 것들은 추락한다지만, 날개가 애초에 없는 것들도 있다. 모두가 새는 아니다. 누군가는 하늘을, 누군가는 바다를 떠돌며 산다. 우리는 전부 다르다. 그러나 시스템은 하나이다. 그 속에서의 자멸을 정말 자멸이라 말 할 수 있을까. 개인적인 일은 결코 개인적이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살아간다. 


 인간이 앓는 부정적인 감정과 신체화 증상들을 '우울증', '불안장애', '대인기피증' 등으로 말하는 것은 썩 탐탁지 않다. 나로 따져 말한다면, 몇 개의 음절에 꾸역꾸역 살아온 인생의 체기와 억척스러움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감정과 신체화 증상에 진단명으로서 이름을 명명하는 것은 아주 큰 카테고리 속에 넣으려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나, 내가 경험한 불안의 감정은 세포마다 빼곡히 박혀있을 정도로 그 수가 많다. 그렇기에 몇 개의 음절은 개인이 앓은 뜨거운 감정들을 대신 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아픔을 단순히 전달할 때 간혹 몇 개의 음절을 발언할 수 있지만 대개 그러지 않는다. 이 바쁘고 어지러운 현대사회에서 개인적인 감정의 병명을 언급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모두가 어느 정도의 비밀을 숨기며 살아가기에 그런 것은 의사에게나 말할 법하다. 나는 삶을 살아오면 깨달은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영혼과 육체는 하나라는 것이다. 영혼은 육체를 대변하고, 육체 또한 영혼을 대변한다. 영혼이 아프면 육체도 아프고 그 반대 또한 그렇다. 나는 삶을 놓치기 시작한 그 시점부터 외부에서 나를 대하는 것 또한 달라졌음을 알았다. 타인도 누군가의 영혼이 느끼는 슬픔과 부정적인 감정들을 은연중에 느낀다. 그렇기에 육체와 영혼이 합일되어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확신한다. 인간에게는 타고난 성질같이 원초적인 보석이 있다. 보석을 갖고 있지 않은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 이것은 가령 성선설이라거나 성악설이라거나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원초적인 보석이라는 것은 해당 인간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것을 지향하고 그것을 알고 있는 본능을 의미한다. 개인이 맞이한 외면적, 내면적 풍파가 모든 것을 깎아내리고 무력하게 만든다 해도, 그 원초적인 보석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러한 풍파들이 원초적인 보석을 더 자각하게 한다. 


 사는 것을 포기해도 삶은 지속된다. 삶의 지속성이 주는 비극과 희망, 그 간극과 낙차를 오가며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삶의 당연한 순리일 수도 있다. 비극에 대한 말은 길고, 희망의 말은 짧다. 비극 속에서도 희망은 잠깐잠깐 빛날 뿐이기 때문이다.그것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이 있기에, 나는 그들에게 원초적인 보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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