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고독했던 한 시절을 보내며,

by 지원


전학을 가서 6학년 2학기를 다니는 동안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건 우리 집이었다.


관사 아파트에서 전세처럼 옮겨 다녔던 우리는 처음으로 분양받은 새 아파트에 입주라는 이름으로 이사를 갔다.


그 당시 우리가 살았던 시에서 가장 가까운 교육의 도시는 대구였고, 부모님은 경산에 새 아파트를 마련하셨다.


입주와 동시에 아버지는 새 근무지로 발령을 받으셨고 통근할 수 없는 먼 시골지역으로 가시는 바람에 그때부터 부모님은 주말 부부를 시작하셨다.






입주하는 아파트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같은 곳에서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생각보다 많이 걸어야 했다.


공사장 같은 흙길을 걸으면 돌다리가 하나 나오기도 했는데, 돌을 하나씩 밟아 강물을 건너고 매서운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서며 부지런히 집까지 걸어왔던 시간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가장 고독했던 한 시절을 보내며 홀로 걸었던 모든 순간들이 외로움에 익숙한 모양으로 나를 변화시켜 갔다.


조금 더 내성적인 사람으로, 조금 더 불안한 나로, 조금 더 숨어있고 싶은 사람으로, 조금 더 울고 싶은 날들로.



처음으로 외로움이란 것이 내 몸 안에 깊숙이 들어왔다. 내 안의 밝음은 모조리 사라지고 울퉁불퉁한 그림자만 남았다.





아버지가 일주일 만에 집에 오시고 2주일 만에 오시고 한 달 만에 오시게 되면서..

턱끝까지 차오른 말들을 삼켜야 하는 순간들이 잦아졌다.


하고 싶은 말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해서는 안 되는 말처럼 느껴졌고, 대화보다 침묵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마지막을 힘들게 보내고 6개월 후에 또 전학을 가야 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엄마가 아프셨기 때문이다.


새 아파트에 입주하고 누구보다 잘 살아보겠다고 다짐하며 엄마는 면허증부터 땄다.

보수적인 아버지 때문에 그동안 운전면허도 따지 못했던 엄마였다.


아버지와 처음으로 떨어져 살면서 가장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는지 엄마는 어디론가 일을 하러 가기도 했고 여기저기 바쁘게 기웃거리셨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이 아파서 모든 것을 그만두게 되셨는데, 병명은 알 수 없음. 병원에 가도 낫지 않는 병이었다. 지금도 무슨 병이었는지 알 수 없다.


기억나는 건 엄마가 많이 아프셨다는 것뿐.


엄마의 지인 중에 철학을 공부하신 친구분이 계셔서 물어보니 지금 사는 곳과 엄마가 안 맞다는 말씀만 하시며 이사 가면 해결된다고 하셨단다.


새로 입주한 아파트가 아무리 좋아도 엄마의 병을 고쳐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또 전학을 가게 된 것이다.


엄마의 고향으로 간다는 것은 엄마를 안심시켰지만,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와 동생의 교육을 위해 부모님이 새롭게 자리 잡은 곳에서 나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공부를 했다.


그런데 엄마의 고향으로 간다는 건 우리 교육을 포기하고 좋은 학교를 포기한다는 거니까. 엄마 친구의 말만 믿고 이삿짐을 쌌던 것이 그 당시에는 달갑지 않게 느껴졌다.


제대로 된 병명을 밝혀야 병은 낫는 것 아닌가.






알 수 없는 분노 같은 것도 생겨났다.


부모님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던 시간들이 부질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공부를 잘했는데. 열심히 노력했는데.




이젠 안 해도 되겠다.


내가 엄마의 고향으로 가는 단 하나의 마음이었다.

더 이상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리라.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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