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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세동 Jul 06. 2023

경찰서 아이들 IV

차세동 외전

지역마다 물론 차이는 있겠으나,

우리들의 지역사회에는 사람들이 아직은 잘 모르는 다양한 인프라.

다양한 기구와 조직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지역사회에 청소년수련시설이나 문화의 집 등이 있다면 청소년 주도의 '청소년운영위원회'가 있을 것이고.

때로는 우리 옆집 이웃이 소속되어 있었을지 모르는 '주민자치위원회'도 있다.

뿐 만 아니라 지역별로 다양한 이름의 기구와 조직들이 존재하는데 모두가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지는 않다.

특히, 청소년 필드에 자리한 나는 사람들의 인식 밖 기구와 인프라들을 자주 마주한다.


회사에서도 출장과 출강을 자주 떠나는 나는 때로 '프리랜서'같다.


정의되지 않는 포지션.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시설과 기관에서도, 심지어 길거리와 동네 가게에서도

청소년과 청년들의 24시간. 모든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자리.

내가 나의 위치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심도 깊지 못할지라도, 하나의 표면에 매몰될 일 없이 그들의 모든 생활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다양한 기구와 조직들이 나를 찾는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도 '이런 기구, 이런 조직도 있구나!' 하면서 놀라고는 한다.


덕분에 넓은 스펙트럼의 청소년, 청년들을 만나고는 한다.

그 스펙트럼 속 양극단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본다.




청소년운영위원회와 같은 청소년 리더 조직에 대한 교육을 나간다.

리더십과 모범적인 양식으로 뭉쳐있는 그들을 보면 수업에 대한 걱정이 반은 날아간다.

당장에라도 경찰관이 될 법한, 참 바른 아이들이다.


위기 혹은 범법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을 나간다.

반항과 경계로 뭉쳐있는 그들을 보면 수업에 대한 걱정이 배가 된다.

애초에 경찰관에게 붙잡힌, 참 서사 많은 아이들이다.


하지만 이 걱정들은 현장을 마주하면 늘 달라지기 마련.


두 가지 수업을 모두 나갈 수 있는 위치는

나에게 참 재미난 풍경을 다양하게 묘사한다.


두 무리 중 '어떤 무리가 더 좋다!'와 같은 가치판단은 결코 하지 않는다.

나한테 온 순간. 다 똑같은 학생이고 다 똑같은 아이들이다.

그 두 무리가 보여주었던 역학을 단순히 비교해 본다.

 



사실 두 수업 모두,

많은 교원이나 강사들은 아이들의 '반응과 집중력'을 고민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는 정반대의 전략을 가져간다.


리더 그룹 아이들의 반응은 사실 폭발적이다.

특히 등장에 많은 힘을 주는 나는, 아이들의 박수와 환호성을 받으며 입장하고는 한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좋은 반응과 집중력을 이끌어내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좋은 반응과 집중력을 유지하느냐'이다.

특히,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그 반응과 집중력이 비교적 빠르게 식어버린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알지 않는가.

나는 수업 시간의 모든 플로우를 촘촘하게 기획하여 그 반응과 집중력의 연장선을 이끌어간다.

커다란 목표는 '10분 같은 수업이 2시간을 흐르게 하고, 10분 같은 수업이 20년의 가치를 만드는 것.'이다.


위기 그룹 아이들의 반응은 척박한 가뭄이다.

등장에 아무리 힘을 주어도, 나 혼자 놀고 있는 양상이다.

욕심내면 안 된다. 억지로 그들 손을 잡으려는 시도는 반작용만 만들 뿐이다.

때문에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좋은 반응과 집중력을 유지하느냐'보다는

'어떻게 좋은 반응과 집중력을 이끌어내느냐'인데, 이는 상당히 세심하게 설계해야 한다.

나는 '적절한 거리감과 적당한 속도'를 입이 닳도록 강조한다.

2시간이 있다면. 120분, 7,200초.

매 순간 조금씩 나에게 몰입할 수 있도록 적절한 거리감과 적당한 속도를 유지한다.

커다란 목표는 '2시간의 수업 끝에, 앞으로의 20년도 함께 하고 싶다는 아쉬움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적당한 거리의 적당한 위치에서 '그들 곁에 흔하지만 좋은 어른'으로 남고자 한다.


그래서 만족스러운 수업이었다면,

리더 그룹의 아이들은 2시간이면 2시간, 3일이면 3일을 폭발적인 반응과 함께 진이 빠져 여운을 즐기고,

위기 그룹의 아이들은 2시간이면 2시간, 3일이면 3일을 이제야 함께 즐길 수 있겠다는 아쉬움을 삼킨다.


-


그들의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를 한 가지 더 뽑아보자면,

세상을 향한 '관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리더 그룹의 아이들은 높은 확률로 '착한 아이', '바람직한 청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때까지의 아이들에게 '착하다'의 기준과 '바람직하다'의 기준은 스스로 만들었다기보다는,

학교와 어른들이 만들어낸 것들이라서 착함과 바람직함에 대한 고찰이 부족한 경우가 더러 있다.


사실 누군가에게는 '눈물 흘리는 이 옆에서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책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 착함'이라면,

누군가에게는 '눈물 흘리는 이 옆을 모른 척 지나가 훗날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이 착함'일 수 있지 않겠는가.

자신이 표상하는 '착하다'와 '바람직하다'의 기준이 없다는 것은 때로는 피상적이기만 하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철학에 대한 도전을 마주할 때 그들은 무너지고는 한다.

심지어 피상적인 것만을 고수하기도 한다.

어른들의 '잘한다~ 잘한다~'를 경험한 아이들에게

지금까지의 모래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두려운 일임에 분명할 터.

그들은 세상을 향한 '커다란 관성'을 지닌다.

그래서 그들은 열광적으로 '갸우뚱'하며 나의 이야기를 듣거나,

그들은 열광적으로 '해설보다는 선택지에 대한 모험'을 택하는 나를 신비하고 또 경이롭게 구경한다.


하지만 그들이 언젠가 성인이 되었을 때,

때로는 자신을 비어있는 알맹이로 자각하는 것을 통해.

때로는 말하는 대로 착하게 살았는데 아무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은 스스로를 만나는 것을 통해.

사회가 착하고 바람직한 아이들에게 무조건적인 칭찬을 통한 무책임한 유기를 범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된다.


그런 맥락에서 위기 그룹의 아이들은 높은 확률로 지금의 세상이 마음에 안 드는 것들 투성이다.

이 사나이들은 모든 것에 새로운 납득이 필요하다.

그래서 삶에 '타의가 아닌 자의적인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는 나의 수업에서

그들은 종종 새로운 납득을 찾는다.

지나치게 현실적이라서 때로는 낭만적인 내가 소개하는 세상은,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다.

'해설지'보다는 '선택지'가 필요했던 그들은 어른들의 뻔한 정답을 주창하는 내용을 기대했겠지만,

일반과는 조금 다른 내용과 형태로 가득 매워진 수업 속에서 조금씩 마음을 열고는 한다.

때문에, 위기 그룹에서는 나의 '팬'이 되는 아이들이 종종 등장한다.

2시간이면 2시간, 3일이면 3일.

수업이 끝나고 나에게 용기를 내어 연락을 하거나, 나를 찾아오는 아이들의 비중이

그 교실과 강당을 자리했던 학생 수에 대비할 때, 위기그룹 아이들이 리더 그룹 아이들보다 더 큰 편이다.

그들에게 나는 어쩌면 유일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겠다고 판단한 사람이었나 보다.

이 지점은 나에게 씁쓸함을 남긴다.

나 말고, 부모가. 선생님이. 그 아이의 곁에 늘 있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었다면,

우리는 조금 더 모두가 행복한 사회에 나아갈 수 있었을 텐데라는 공상 섞인 씁쓸함이다.




내가 마주해 온 스펙트럼 속 양극단에는 이러한 우주가 담겨있다.

내가 바라본 우주였을 뿐이니, 이것은 결코 정설이 아니다.

나의 글이,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는 우주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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