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세상사 유비무환 아닌지
올해 안에 2만 점이 조금 넘는 항공 마일리지가 소멸한다는 메일이 왔다. 작년에 다녀왔으니 올해에는 해외여행을 갈 생각이 없었지만 그냥 날리기에는 꽤 아까운 금액이었다. 놀이공원이나 영화표 할인으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가성비가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떤 비행기표를 사야 하나 싶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족 해외여행이 결정되었다. 그것도 여행사 없이! 이것이야말로 스스로 불러온 재앙인가.
일정은 10월 중순, 3박 4일 도쿄행으로 결정되었다. 나는 일본어를 못하고 도쿄에 가본 적이 없지만 이미 항공권 예약은 완료되었으니 되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준비뿐이다. 그렇게 4월 말에 10월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나는 보통 A4 용지를 접어서 연표를 그리듯이 여행의 타임라인을 그리는 편인데 이번에는 초안 작성 및 정보 조사용으로 종이를 2장이나 소모한 다음 구글 독스에 여행 일정을 정리하게 되었다. 일행 중 요주의 인물인 아빠 때문이었다. 가족 중 나이가 가장 많고 투덜거림이 심하며 무릎이 불편해 많이 걷지 못하는 아빠를 고려하여 넣어도 되고 빼도 괜찮은 옵션들을 추가로 고려했고, 프라이빗 투어 상품을 검색했으며 경로마다 택시 거리를 적었다. 내가 길을 헤매면 당연히 구시렁댈 것이기 때문에 일정 중 걸림돌이 될 확률이 높은 도쿄 지하철 이용에는 특히 신경을 더 썼다. 노선 색깔과 타는 역 플랫폼 번호를 적었으며 혹시 몰라 엘리베이터가 나와 있는 내부 지도까지 본문에 첨부했다. 택시 이용을 대비하여 도쿄의 러시아워 시간대까지 알아보았다.
일정은 하루에 2~3군데를 돌아보는 정도로만 넉넉하게 구성하고, 첫날은 아예 야경 구경을 위한 스폿에만 가기로 정했다. 예상되는 숙소 주변에 구글맵 평점이 준수한 곳에는 음식점에는 별표부터 찍어두었다. 가이드북에 나온 장소들은 그야말로 무지성으로 검색하고 별표 찍기를 반복했다. 한편으로는 식당에서 웨이팅을 길게 할 수 없을 테니 프랜차이즈 식당 이름만 10개 넘게 적어놓았다. 아빠는 2시간 정도마다 화장실에 가야 하므로 도쿄에서는 공중화장실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도 검색해 보았는데, 쇼핑센터나 백화점이 많고 지하철역 화장실과 편의점 화장실까지 이용할 수 있다고 하니 그 점은 다행이었다. 앞으로 가이드북을 한 5번쯤 더 정독할 예정이다.
다행히 든든한 돈줄이자 여러모로 믿음직스러운 언니가 같이 갈 예정이라 언니에게 구글 독스 경로를 공유해 주었더니 언제 이런 걸 다 했냐면서 본인 가족의 여행 계획도 짜 달라고 했다. 때 이른 프라이빗 여행사의 서비스에 감동하신 모양이다. 하지만 언니의 여행 일정은 12일로 매우 길었기 때문에 일단 절반만 봐주기로 하고, 그것도 내가 가는 것처럼 문서로 정리해 주기보단 더 간단하게 카카오톡 게시물로 대신해 주었다(그것만 해도 A4 2~3장 분량은 나올 것 같다). 그래도 고객 만족이 대단하셨는지 호텔에서 밥을 사준다고 한다.
언니가 마지막에 요청한 도쿄 디즈니랜드 관련 사항까지 모두 보내줬으니, 오늘부터는 좀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큰 틀을 잡아 놓는 건 언제나 마음이 놓인다. 비록 그게 너무 일러서 일부 숙소 홈페이지에서는 날짜 조회까지 안 될 지경이긴 하지만.
그나저나 언니, 빨리 메시지를 봐줘. 그리고 호텔에서 밥 사주는 거 말고 운동화 하나만 사주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