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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백수 Oct 03. 2024

런던 정착까지 딱 두 달

2월 15일 아침, 느닷없이 집주인 M이 연락해왔다. 아니 아무리 노인이라 해도 아침 7시 15분부터 연락을 해오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하도 무슨 일이 많으니까 걱정부터 된다.


"굿모닝. 냉장고 설치하러 오늘 아침 8시에 가겠다는데 괜찮니?"

"갑자기? ㅋㅋㅋ ㅇㅇ '무적권' 콜이야. 고마워 M."


오늘 등교는 엄마랑 해야겠다. 아이 학교까지는 걸어서 10분. 매일 아이와 손 잡고 임페리얼컬리지를 관통해 걸어가는 길은 내 즐거움인데. 냉장고는 중요하니까. 설치 기사는 두 명이 왔다. 


"근데 전에 왔던 설치 기사들은 왜 전원을 못 찾겠다고 하고 가버렸을까?"

"전원을 못 찾았다고? 음 요즘 일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고 이민자들을 내보내는 회사들이 있어. 인건비가 그들이 싸기는 하니까. 근데 일이 안 되지 걔들."

"우리 가족 3명이 A4 용지 크기 냉장고로 3주를 버텼어."

"저런 안 됐네. 하여간 넌 이제 냉장고가 있어. 축하해"


새 냉장고를 전원에 연결하기까지 10분도 안 걸린 것 같다. 이 쉬운 일이 참 오래도 걸렸다. 우리가 입주하기 전부터 문제였으니까 5주는 걸린 것 같다. 한국이었으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이게? 심지어 현장에 나왔다가 그냥 돌아가다니..


하지만 영국인들은 공통적으로 브렉시트 이후로 모든 게 나빠졌다고 말한다. 이젠 비자를 받아야 하는 불편한 나라가 돼 버리자 유럽 다른 나라 출신 숙련공들이 대거 빠져나가버렸다는 것이다. 물가는 치솟고 급여는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심지어 쓸 만한 영국인 기술자들도 많이 외국으로 갔다고 했다.그래서 이민자는 줄고 일자리가 많이 생겼느냐? 그럴 리가.


숙련 노동자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미숙련 불법 체류자들이 차지했다. 시간은 더 많이 걸리고 뭐 하나 되는 일이 없고 와중에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다들 아우성이다. 올해 선거에서 정권 교체가 이뤄진 게 우연이 아니다.


"설치 완료. 나 이제 시원한 맥주를 마실 수 있게 되었어. 고마워 M. 먼 길을 돌아 왔지만 아무튼 우리는 해냈어!"

"As you say, onwards and upwards."


그래 하나하나 해결이 되어가기는 하네. 냉장고 하나에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이제야 집안 꼴이 좀 정상화된다. 마음의 평화.


활동 흔적이 없다 여전히

그리고 2월 18일. 일 주일만에 다시 찾아온 방역 업체 직원. 이 자는 왜 부엌 바닥에 엎드려서 한참을 갸웃거리는가.


"흠 이거 정말 이상하네."

"왜 왜 무슨 일이야? 죽은 쥐가 또 있다고만 하지 말아 줘. ㅜㅠ"

"다행히 그렇지는 않아. 쥐가 활동한 흔적이 전혀 없어."

"쥐약을 전혀 안 건드렸다고?"

"응. 형광물질 발자국도 없어. 먹이를 많이 먹지는 않더라도 보통은 통 안에는 들어왔다 나가거든. 그럼 발에 형광물질이 묻은 채로 돌아다니게 된다고. 자외선 플래시를 비추면 이동경로가 쭉 보이게 되는데, 없어."

"좋은 소식이야 나쁜 소식이야 그게?"

"글쎄. 쥐들이 우리 생각보다 굉장히 똑똑해. 사람의 손이 닿은 게 확실하다 싶으면 안 건드리기도 하거든. 이 집에 쥐가 정말 없다면 좋은 소식이고 쥐들이 우리가 놓은 게 먹이가 아니라 독약이라고 확신해서 안 건드린 거라면 나쁜 소식이지. 알 수 없어."

"임페리얼 컬리지가 바로 옆이라 그런가 쥐들도 박사학위라도 있는 거야?"

"ㅋㅋㅋ 그런가봐. 박사 쥐들인가봐."


방역 업체 직원은 해맑은 표정으로 '기다림 한 주 더 연장' 형을 선고했다.


"똑똑한 쥐들을 일주일 더 시험해보자. 쥐약을 새로 바꿀게. 통도 새 걸로 바꾸고. 통을 놓는 위치도 좀 바꿀 거야. 주의사항은 알지? 다음주에 봐."


이 집에 이사 온 게 벌써 한 달 전이다. 쥐 문제가 다음주까지 해결이 될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희한하게 꼬여 간다.


약 먹은 쥐는 밝은 곳으로 나온다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 나는 별 공부를 다 한다. 쥐약을 먹고 죽어가는 아이들이 왜 인간이 있는 거실 바닥으로 기어나오는가. 시골집 쥐들은 천장 위에서 뛰어다니지 사람 앞으로, 밝게 조명이 켜진 방으로 내려오는 법이 없었다. 런던 쥐들은 겁대가리를 상실한 것인가? 검색을 시작한다.


아니었다. 약기운 때문이었다. 쥐약은 항응고제다. 주 성분은 플로쿠마펜이나 쿠마테트라릴. 혈액이 굳지 않게 하는 약물. 쥐약을 치사량 이상 먹은 쥐는 대개 2~3일 후부터 본격적으로 약기운이 나타난다. 몸 속 비타민K가 다 소모된 뒤부터 본격적으로 효과가 나타난다나.


곧 가장 가는 혈관인 눈의 혈관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서서히 '눈에 뵈는 게 없어진' 쥐는 뭔가 보이긴 하는 밝은 곳으로 나와서 결국 죽음에 이른다.


쥐약의 작용 기작을 감안하면, 높은 확률로 입주한 뒤에 집에 들어 왔겠다. 집안엔 쥐약이 없었으니까 아마도 치사량의 약물을 먹은 채로. 정말로 쥐가 밖에서 들어올 만한 구멍이 없다면, 이미 죽은 놈들이 전부일 수 있겠다.


이 집엔 쥐가 없어

2월 25일

"이번에도 안 건드린 거야?"

"ㅇㅇ 전혀. 내가 자외선 플래시를 켤 테니까 봐. 쥐 발자국은 어디에도 없어. 통 안쪽도 봐. 쥐약에 이빨 자국 하나 없어. 쥐가 있다면 이럴 수는 없거든. 너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축하해."

"죽은 채로, 그리고 죽어가는 상태로 발견된 애들은 그때 그럼 어딘가에서 들어온 아이들 전부였구나?"

"아마도. 이 동네 쥐들이 다 어디로 떠났나봐. 다른 집도 비슷해. 흔적이 없더라고."

"집단 멸종이면 좋겠다. 고마워."

"집단 멸종이면 안 되지. 내 일자리인데."

"너 런던 경찰청 CSI에 지원해봐. 플래시로 흔적 찾는 거 보면 진짜 소질 있어 보인다 너?"

"으하하 오늘 들은 얘기 중에 제일 마음에 들어. 고마워. 잘 지내."


방역업체 직원은 쥐들이 나온 통로로 내가 지목한 거실 붙박이장과 벽 사이 틈을 봉쇄하고 떠났다. 외부에서 들어올 만한 구멍은 없다. 혹시 모르니까 약은 좀 놔주고 가겠다고 했다. 이걸로 끝. 박사 쥐야, 다시는 보지 말자.


그리고 집주인 M은 예상 외로 흔쾌히 비용을 내 줬다. 내 이메일을 받자마자 곧장. 방역 업체를 부른 비용은 물론, 냉장고 값, 전구 값 등 각종 실비도 꼼꼼이 청구해서 다 받아냈다. 다만, 그동안 받은 고통을 감안해 첫 달 월세의 절반 가량인 1,400파운드를 위자료로 달라는 내 요구는 기각했다. 대신 300파운드를 보상했다. 이 정도로 만족 하자. 귀찮다. 다 해결 된 게 어디인가?


정착은 끝났다. 히드로에 내린 12월 26일부터. 집 계약 직전에 파기하고 보증금을 날리고. 두 번 이사를 하고, 냉장고를 설치하고 쥐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꼬박 두 달. 엄청난 하드랜딩이었다. 이제부터는 홈 스윗 홈에서 런던 1년 살기를 즐겨보자. 남은 기간은 열 달 뿐이다.  M 말마따나, "As you say, onwards and upwa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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