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라는 감각은 없다. 사실 한국에서도 그랬다. 종갓집 장손인 아버지의 결단으로 차례를 지내지 않게 된 뒤로는 추석이고 설이고 그저 연휴일 뿐이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가족이 모여서 안부를 묻고 정을 나누면 그만이다.
만리타향 런던으로 오니까 더하다. 심지어 여긴 연휴도 아니다. 그래도 가족이 오니까 좋다. 대망의 그날, 영국인 J 형님네가 오신다.
런던 첫 손님 맞이. 우리는 소갈비를 사서 갈비찜을 했고 배추를 사다가 겉절이를 만들었다. 자고로 명절에는 기름 냄새가 좀 나야 하는 법이다. 마트에서 모둠 해물을 사다가 해물김치전을 부쳤다. 온종일 바빴는데 정작 손님이 오시면 상차림은 왜 이리 허술해 보이는가. 어쨌든 해피 뉴 이어. 세뱃돈 주세요.
"J, 우리 m 때문에 죽을 지경이에요."
아내는 쥐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조차 싫어했다. 우리는 식사 시간 내내 마우스를 마우스라 부르지 못했다. m이라고 했다.
"시커멓고 큰 놈이야 아니면 작은 애들이야? 그 왜 만화나 영화 같은 데 나오는 작은 애들은 해롭지도 않거든."
"생쥐였던 것 같기는 해요. 그런 애들은 괜찮다고요?"
조카 S는 심지어 m을 좋아한다고 했다. 다시 나오면 자기 달라고 키우고 싶다고. 아니 매일 불면의 밤을 보내는 우리가 이상한가. 하지만 J는 진짜로 평온했다.
"런던에는 어디에나 m이 있어. 이 건물도 지은지 꽤 오래 된 것 같은데 나오는 게 당연해. 게다가 이 집은 그라운드 플로어잖아. 퍼스트 플로어 위쪽으로는 그나마 괜찮았을텐데. 아무튼 집쥐는 해로운 동물로 분류하지만 생쥐는 그렇지 않아.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그냥 같이 사는 거야."
"으악. 서울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요."
"아냐 정말 괜찮아. 만일 또 m이 나오면 잡아서 멀리 갖다 버려. 5킬로미터 밖에 버려야 이 집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야."
J는 철물점에 가서 덫을 사다가 놓아보라고 했다. 음, 덫에 걸린 아이를 내가 모시고 버스를 타고 멀리멀리, 최소 5킬로미터 밖에 버리고 돌아와야 하는 거군요? 소오름. J는 속도 모르고 유쾌하게 웃었다.
"방역업체를 불렀다면 뭐 곧 해결 되겠네. 비용은 집주인에게 청구하면 될 거야. 입주한지 시간이 한참 지난 뒤라면 세입자 돈으로 해야 해."
"왜요 내가 쥐구멍을 뚫는 것도 아닌데 ㅜㅠ"
"쥐가 언제 어디로 들어왔는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일단 세입자 책임이라고 할 수도 있어. 아무튼 집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세입자가 문단속을 부주의하게 했거나 집안에 쥐 먹이를 방치했거나 해서 쥐를 불러들인 꼴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집주인이 모든 걸 다 해주려고 하지 않을 거야."
"저희는 입주 10일 사이에 쥐가 두 번이나 나왔다고요."
"응. 그러니까 아마 집주인이 비용은 낼 것 같은데? 집주인과 협상을 잘 해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연락을 주로 왓츠앱으로 한다고 했지? 이런 내용은 왓츠앱 대화로 하는 게 적절하지 않아. 공식적으로 서명한 편지를 보내거나 이메일을 써. 근거가 남는 게 좋아. 막 따지지는 말고 정중하게 써."
이 마당에도 난 정중해야 하는 거다. 그날 나는 '내 사회적 신분이 격하되는 느낌이다'라고 말 했던가.
사방에서 문제가 생기는데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와중에 나는 정중하고 차분하고 예의 바르게 항의해야 했다. 인공지능 chat GPT로 이메일을 쓸 때 반드시 '단호하지만 정중한 톤의 영국식 영어로 작성해'라고 지시했다.
이게 더 좋은 것 같아. ㅇㅇ 인정. 근데 나 너무 답답해. 난 정말로 2등 시민이 된 것만 같은 자존감 하락을 경험하고 있었다.
처형은 팁을 알려줬다.
"아이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라는 점을 강조하세요. 영국에서는 아이들 문제에는 아주 예민하게 반응해요. 아이가 쇼크를 받았다. 감염 우려도 크다. 빠르고 근본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이런 취지를 쓰면 집주인이 아마 바로 해결해줄 거예요."
사실 돈보다는 이 상황이 빨리 해소되기를 바란다. 돈이야 뭐. 문제를 해결한 뒤에 이야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