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네일 사진은 2층버스의 2층 맨 앞자리에서 찍은 11월 10일 밤 10시쯤 피카딜리서커스 모습입니다. 차창이 지저분해서 사진이 예쁘지는 않습니다만. 아무튼 천사가 날아오릅니다. 런던은 겨울 분위기에 완전히 들어섰습니다. 낮 4시반이면 어두컴컴해지고요. 그나마 저렇게 조명이 예쁘게 빛나니까 낫습니다.
여름이 한창이었습니다. 제가 브런치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한국의 여름은 실은 견디기 쉽지 않습니다. 해가 나면 살갗이 따가울 지경이고 비가 내리면 또 얼마나 지독하게도 내리던지요. 반대로 런던의 여름은 아름답습니다.
햇살이 눈을 찌뿌리게는 할 지언정 한낮에도 살갗을 태우려 들지는 않습니다. 바람 살랑이는 나무 그늘에 앉아 있으면 참 좋아요. 습도가 높지 않아서 끈적이는 불쾌감이 없거든요. 맥주나 스파클링 와인이라도 손에 들려 있다면(이럴 때라도 '책을 잡았다면'이라고 쓰고 싶지만 그렇게 살고 있지는 못합니다 아쉬울 따름입니다) 여기가 천국이라고 해도 기쁘게 속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여름 런던은 사랑스럽습니다.
그 좋은 여름, 나가서 더 즐기지 않고 왜 여기에 글을 쓰기 시작했나 생각해봅니다. 도저히 적응이 안 되던 한겨울 추위 속에서도 아니고, 돌아갈 날이 다가오는 지금 같은 시기도 아니고. 왜 한창 좋은 여름이었을까요. 어쩌다 생각 나면 쓰겠다,도 아니고 어쩌자고 일주일에 세 번씩 꼬박 글을 공유하겠다고 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도 스스로를 잘 모릅니다. 죽기 전에는 철이 들어서 좀 알게 되려나요.
그런데 말입니다. 대책 없는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이에, 제 브런치 구독자가 100명이 됐습니다. 네, 당신까지 포함해서 세 자릿수가 됐어요. 100명이 내 이야기를 기다리다니요. 구독해도 돈을 내지는 않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만 저는 여전히 놀랍고 궁금하고 그렇습니다.
런던 백수의 어떤 글이 여러분의 마음을 당겼을까요. 그저 그런 삶의 어떤 대목이 호기심을 느끼게 했을까요. 여러분은 제게서 무엇을 기대할까요. 역시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두렵기도 합니다.
지난해 말에 10살 아이까지 세 식구가 런던까지 온 건 어떤 조바심 때문이었습니다. 1년 살기를 마음 먹고 한국에 모든 것을 두고 왔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거든요. 버티다간 정말 죽을 것만 같은 위기감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도망치길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살아 남았고, 조금은 성장도 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적응은 쉽지 않았습니다. 집 구하기부터, 집을 안정시키는 것부터, 이런저런 소소한 문제들이 생길 때마다 해결하기까지, 하나도 쉽게 흘러가질 않았습니다. 객지에 오니까 사는 게 참 고달파집니다. 일단 영어가 잘 안 되기도 하고 아는 사람도 없는 곳입니다.
차라리 더 고독하고자 했습니다. 런던에 와서도 한국인들과는 거리를 유지하고 살았습니다. 한인들이 모여 사는 뉴몰든에 가본 게 딱 두 번입니다. 이젠 한인타운 안 가고도 한국 식재료 구하기도, 한식 사먹기도 어렵지 않은 환경이기도 합니다. 한국인들 다니는 교회에도 딱 한 번 가보고 발을 끊었습니다.
아이가 다니는 사립학교 학부모 모임 같은 데 가면 어쩔 수 없이 한국 국가대표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에 하루가 다르게 온기가 생기는 걸 느끼면서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는 하더군요. 국뽕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관심을 보이고 손을 내밀고 호감을 담아 질문을 해오니까 적응도 한결 편해졌습니다. 저희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변화였습니다.
그렇게 영국인들 사이에, 거하게 헛발질을 해대는 다른 외국인 가족들 사이에 섞여들었습니다. 노력했으나 끝내 같은 질감이 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미국이 멜팅팟이라면 영국은 샐러드볼'이라는 문구를 어디선가 봤기 때문입니다. 여긴 완전히 녹아들려고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그냥 내 색깔 그대로, 우리 습성 그대로 있어도 될 것 같았어요. 심지어 우린 여기 정착해서 계속 살 것도 아니니까요.
짬을 내서 영국 안에서는 바스와 에든버러에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저가항공과 기차와 렌터카를 갈아타며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 노르웨이 아이슬란드를 돌았습니다. 새로운 세상에 놀라고 감탄하고 때로는 지지고 볶으며 피곤해 했습니다. 여행기도 쓰자 생각했지만 마지막 여행지 아이슬란드에 대해서만 두 편 쓰다가 말았군요. 게으름은 불치병입니다.
우리 가족이 내돈내산 외국살이, 말은 아름답지만 돈에 쪼들리고 시간에 쫓기는 이 삶의 배경으로 런던을 고른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문화와 예술과 역사가 있는 곳, 삶을 풍요롭게 즐길 수 있는 대도시. 런던 만한 곳이 없다 여겼습니다.
틀리지 않았습니다. 바비칸 센터, 위그모어홀, 카도간홀, 사우스뱅크센터에 자주 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영국박물관, 내셔널갤러리, 테이트모던, 사치갤러리, 빅토리아알버트뮤지엄도 놀이터 삼고 사랑방 삼고 단골 밥집 삼았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듣고 즐기며 한국에서 생긴 상처에 새 살이 돋기를 기다렸습니다.
여름엔 내내 BBC 프롬스에 출근도장을 찍다시피 하면서 클래식 음악에 흠뻑 빠져 지냈습니다. 임윤찬과 조성진 뿐 아니라 너무너무 좋은 연주들이 많았습니다. 그 감동을 나누고도 싶었습니다만, 전문가 수준의 리뷰를 쓰는 고수들이 여기저기 정말 많으시니 저까지 보태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저 스스로가 한 뼘쯤이라도 성장한 것 같지만 누구와 나누는 형태의 쓸모는 없을 것 같군요. 그냥 혼자 즐기기로 합니다.
그저 런던의 공연장 정보 같은 것만, 문화예술 관련 시설의 후원회원이 되는 방법만 나눠드렸습니다. 조금만 검색하면 다 얻을 수 있는 것들이라 크게 가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요.
찬란한 것만 같은 런던 1년살기, 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한국에서 모아둔 돈 다 까먹고, 마통에서 돈을 꺼내다가 노는 입장이니까요. 빚 내서 노는 쫄깃함, 누구한테도 추천은 못 하겠습니다.
와중에 한국 돈 가치는 엄청난 속도로 떨어집니다. 2023년 말에 1650원도 안 되던 원-파운드 환율이 1800원 선을 왔다갔다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얼마를 손해보는 건가요 이게. 달러 환율은 1400원을 넘네 마네 하는데 파운드 환율은 왜 이 지경이랍니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런던백수 생활은 이제 길게 남지 않았습니다. 1월 12일에 히드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탑니다. 인천공항에는 13일 저녁에 내리겠군요.
돌아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보고 듣고 배우고 느낀 것들을 종종 써보겠습니다. 뭐 볼 게 있다고 구독을 하시는지 진짜로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어떻게든 약속은 지키려고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일주일에 꼬박꼬박 세 번씩 매주 올리지는 못할 겁니다 아마.
돌아가서 출근할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저도 좀 놀기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저는 무척 게으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까지는 못하겠어요. 대책 없는 약속은 안 하는 게 피차 정신 건강에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구독자 세 자릿수 도달에 즈음해서, 뭔가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편지를 써보려 했습니다. 연서, 연애편지 같은 느낌으로 써야지 했는데 쓰다보니 역시 좀 뚱한 채로 마무리되는군요. 이 편이 나을 겁니다. 너무 기대하지는 말아주세요. 그게 서로를 위해 나을 거라고요. 진짭니다.
아무튼 상당히 많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톤앤매너가 아주 이상한 문장이군요. 런던백수는 이런 사람입니다.
그나저나 구독자가 너무 많이 늘지는 않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부탁이니 네 자릿수까지는 절대 가지 말기로 해요. 그럴 리는 없겠죠. 그래야 합니다. 좀 무섭기도 하거든요 진짜로. 다음번엔 좀 영양가 있는 글을 써보려고 노력은 좀 해보겠습니다. 구독자 여러분 고맙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