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날엔 화분을 밖에 둔다. 작은 턱에 올려 둔 싱그러운 식물과 꽃을 본 사람들은 구경하러 오고, 가끔씩 작은 꽃을 들고나간다. 하지만 손에 들린 모든 꽂이 사랑스럽지는 않다.
남자아이가 가게 안에 있는 화분 받침대를 징검다리 걷듯 밟고 갔다. 나는 놀라서 다가가고 어머니는 죄송하다며 고개 숙였다. 속은 상해도 인상을 찌푸릴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사과하는 어머니가 고맙기까지 했다. 앞서 엄청난 부모님을 본 다음이라 어머님은 천사로 보였다.
젊은 부모였다. 들어오기 무섭게 5-6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를 방목한 것처럼 풀어놓고 뛰어다니는 걸 방관했다. 방금 막 걸레질을 마친 상황이라 바닥은 아직 축축했다. 나는 다칠까 봐 마음 졸이며 부모님께 제재를 부탁했지만, 별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애들이 뛰어다니다가 다칠 수도 있는 거 아니냐며 하하 웃는 모습에 안심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거기서 따라 웃는 내가 참 멍청했다.
꽃다발을 다 만들고 계산하고 모든 게 다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남자아이가 작업대 위에 있는 꽃을 자연스럽게 가지고 갔다. 나는 가지고 가면 안 된다고 했다. 어디까지나 파는 상품이고 원래 만들려고 했던 꽃다발에서 가격이 오버돼서 뺀 꽃이다. 하지만 부모는 그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를 쏘아보며 이를 잘근잘근 씹었다.
아이가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 애가 좀 가지고 가겠다는데 그렇게 아깝냐, 예의가 없다, 애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야겠냐 등등. 지금 욕을 먹고 있는 건 난데, 누가 보면 내가 아이에게 삿대질하면서 욕이라도 한 줄 알겠다. 나는 그날 영문도 모른 채 사과했다. 사과할 이유는 없지만,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서 계속 죄송하다고 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는 부모가 아이와 함께 오면 몸이 저절로 굳는다. 모든 부모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경험이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
글에는 적을 수 없지만, 아이가 꽃을 찰흙처럼 만지작 거리는 걸 말리다가 욕먹은 적도 있다. 그때 들은 욕 수위를 생각하면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야기가 현실로 다가온다. 노키즈존이라는 단어가 왜 나온 지 알 것 같다.
아이들을 배려하고 배우는 과정이니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하지만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가게에 있는 사탕을 먹다가 맛이 없다고 바닥에 뱉고, 실수로 깬 화분을 모른척하고. 나는 정말 어디까지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더 이해가 안 가는 건, 이런 아이를 아무 제재 없이 두는 부모다. 내 아이가 다칠까 봐 오냐오냐하며 감싸는 건 능사가 아니다. 또 다른 이름의 학대다. 지금은 어리다는 이유로 넘어갈 수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 어릴 때부터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어른이 된다고 알 수 있을까? 아니다. 장난이란 이유로 무마되고, 그냥 넘어간 걸 학습한 이상, 커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제대로 된 교육과 처벌을 받아 본 적 없으니 한 살 버릇 여든까지 가는 거다. 처벌로 강력한 체벌을 주라는 소리는 아니다. 적어도 모든 사건사고를 어리다는 이유로 방관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만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