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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emian Writer Feb 19. 2024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내 어렸던 날의 당신에게

당신에게.


안녕. 이런 글이 당신에게 결코 닿지 않을 곳을 찾다보니 여기에 이르렀어요. 한 달 쯤 되었나봐요. 당신이 드레스를 입고 찍은 사진을 본 날이요. 우리 참 어렸었죠. 어렸다는 말로도 모자를만큼 어렸어요. 교복을 입고 있던 두 사람이 뭘 안다고 사랑을 얘기하고 기다림을 약속하고 아주 오랜 후를 꿈꿨을까요. 생각해보면 우리 둘은 너무 어린 날에 만나 참 되도 않은 풋사랑을 했어요. 그러나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었음에도, 저는 사랑이라는 것이 그저 어른들만의 전유물이고 자격 없던 우리가 감히 그 세계에 침범했다고 얘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나이대에서만 해석되고 읽히는 사랑도 있으니까요. 사랑의 시작과 끝을 당신에게서 배우며 저는 조금 더, 아주 조금 더 성숙해질 수 있었거든요. 모든 걸 대학 이후로 유예해야했던 서글픈 나이와 세상에서, 우린 최선으로 서로의 시간을 보듬었어요. 쉽게 잊지는 못할 겁니다.


그땐 싸이월드라는 게 세상에 있었죠. 미니홈피에 더 나아가 배경음악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참 선진적인 플랫폼이었네요.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bgm으로 받았었고, 그게 아마 당신이 내게 준 첫 선물이었던 듯 해요. 그토록 사교육에 치이면서도, 싸이월드에 매일 커플 다이어리를 쓰기도 했네요. 그때 우리 참 애틋했었어요. 맘껏 연애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우린 우리대로 우리를 지키려 부단히 애썼어요. 그 노력의 따뜻한 여진이 아직 제게 남아있습니다. 당신도 언젠가 학창 시절을 떠올릴 때 너무 그때의 당신을 철이 없었다고만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해요. 아니, 우리의 시간이 의미있었다고 기억해주면 좋겠습니다. 아무 기억도 아닌 게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말이죠. 물론 우리 시간이 아쉬움도 많고 참 아프게 슬프기도 했지만요.


그때 그 마지막이 아쉬워서, 우린 대학에 와서 한 번 더 서로와 자신에게 기회를 주었죠. 재회의 환상에 많이 모자랐던 스물의 짧은 날들이었어요. 어떤 기억은 기억에서만 존재하는 게 되려 그 기억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그래도 어른이 된 후 우리 나눴던 그 짧은 만남을 통해 우린 지난 시간의 아쉬움과 미련을 털어낼 수 있었어요. 당신이 이후 나에 대해 얼마나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당신을 가끔 떠올렸어요. 그냥 어린 날의 연인 아닌 연인이라는 담백한 사실의 주인공으로요. 그래도 당신이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니, 내 어릴 때의 한 페이지가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거기에, 우습게도 마음에 '쿵' 소리가 나기도 했답니다. 이상하죠. 저도 그런 제가 너무 이상해서 놀랐어요. 아마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서 그럴 겁니다. 어느덧 벌써 이제 이런 나이가 됐구나 싶었어요.


손을 잡고 서로를 안는 것에 우린 모두 조심스러웠죠. 어느 추운 2월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노래방에 가서 어색하고 민망하고 조금은 쑥스럽게 노래를 같이 부르다, 내가 노래 한 곡을 그토록 졸랐죠. 당신은 그에 못 이겨 마이크를 두 손으로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한 곡을 불러줬어요. 당신이 그 노래를 부를 때의 떨림이 우리 나눈 시간들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요. 그날 지하철 역 플랫폼에서 작별하기 전 당신이 내 볼에 해주었던 작은 입맞춤이 당신과 나의 10대가 공유할 마지막 접점임을 알지 못했어요. 그럴 줄 알았다면 손을 잡고 조금 더 플랫폼의 끝과 끝을 오가며 더 많은 얘기를 했을 텐데요. 우리 연애는 끝내 들켰고, 마치 독립운동을 하다 걸린 인물들처럼 추궁을 당해야 했죠. 그때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미안했어요. 돌이켜 보면 그 순간들의 저는 참 비겁했던 기억이 나네요. 혼자 그 모짐을 감당케 하여 다시 미안합니다.


글이 길어졌네요. 저는 글이 길어지면, 이딴 쓸모없는 글이 지면을 이렇게 낭비해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어요. 당신과 연락을 나눈지도 너무 오래 돼서, 당신께 따로 전할 당부는 없습니다. 그냥 그래도 남들보다는 덜 불행하고 씩씩하기를 바라요. 내가 아는 당신은 참 멋진 사람입니다. 도전을 좋아하고요. 용기도 있었죠. 사실 누가 누굴 걱정하겠어요. 당신은 살아왔던대로 멋지게 살 거예요 분명. 이건 확신할 수 있어요. 어떤 노래 가사는 '적어도 너보다는 잘 살고 싶었어'라고 시작됩니다. 나는 당신보다 잘 살고 싶지도 그렇다고 반대가 되고 싶지도 않아요. 그냥 우리 둘 다 현명하고 지혜롭게 삶의 단계들을 극복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래도, 의례적인 걸 알면서 우린 굳이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기도 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해사한 웃음으로 행복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당신께 당신의 말투를 배웠고, 당신의 글씨를 알아갔어요. 자습시간에 몰래 썼다는 그 편지를, 이젠 헤어졌다며 다짜고짜 찢었던 내 어린 날의 성급함을 조금 반성합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어렸고 많은 걸 몰랐네요. 그래도 다시 생각해보면 그걸 가지고 내내 당신을 추억하는 것도 정답은 아니었을테니, 그냥 난 후회할 무언가가 필요한가보다 싶기도 합니다. 자 이제, 글을 마무리 지으려고요. 드레스 입은 모습이 예쁘고 얼굴엔 미소가 가득해보여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되려 제가 오지랖 넘게 기쁘기도 했어요. 우리 이제 다 컸고, 잘 자랐네요. 우리 둘한테 다가올 삶이 너무 모질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조금은 열린 공간에 이런 글을 쓰는 건, 축하한다는 말이 행여라도 당신께 닿을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아서네요. 앞으로도 덜 아프게, 사진 속의 미소가 잘 간직될 수 있기를 마음으로 빌어요. 참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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