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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emian Writer Feb 12. 2024

데이식스,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실없이 또 철없이 당신과의 소중한 날들을 하루하루 보내며

    나쁘지 않은 날들이다. 감히 '나쁘지 않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으니, 어쩌면 좋은 날들일지도 모르겠다. 글은 늘 나의 도피처나 해방구였다. 글을 써야만 했고, 썼기에 견뎠던 날들도 있다. 모진 순간들마다 글쓰기에 참 많이 기댔다. 무언가를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됐을 때 글을 써야 했고, 그러니 글쓰기가 필요 없어지는 순간을 조금은 흠모했다. 글쟁이로서 맘에 드는 글을 쓰는 것보다 나의 아프지 않음이 늘 우선이었고, 마침내 최근에는 글에 대한 욕망이 그리 크지 않은 다행스러운 날들을 보내고 있다. 현실을 잊기 위한 수단인 글을, 현실을 굳이 잊어야 할 필요가 없을 땐 미안하지만 그리 절실히 찾지 않게 되었다. 무사하게도, 아픔이 덜한 요즘이다. 무탈한 날들의 잔잔한 지속이 다소 낯설지만 싫지 않다. 그 사이에 어떤 격정적인 변화가 삶에 찾아왔던 건 아니다. 로또에 당첨이 되거나 이에 준하는 행운이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다만, 알아갈수록 궁금한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생을 지탱하기 위해 그동안 느껴왔던 글쓰기에 대한 갈급이, 이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다소 해소됨을 경험하는 중이다.


    아직은 조심스러운 관계다. 아주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것만 같은 자연스러움이 종종 보이기도 하지만, 함께 같은 곳을 응시하기 시작한 이후의 물리적인 기간 자체가 그리 길지는 않다. 오랜만에 만나게 된 열렬히 탐구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니 클리셰 같지만 문자 그대로 '알아가는' 중이다. 아무리 알아가도 나는 모르는 게 더 많을 테지만, 누군가를 이토록 알아가려는 노력이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다며 부당히 비관하고 싶지는 않다. 이 사람은 그 한계까지 알아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신기한 사람이다. 우린 어쨌든 서로 다른 사람이다. 처음에 비해서 당연히 이젠 서로가 꽤 많이 편해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타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그 사람 역시 결단코 내가 될 수 없다. 서로에 대해서 우린 많이 알아왔고 앞으로도 알아가겠지만, 이 사람과는 여전히 타인일 거라는 진실에 나는 더욱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외면하지 않을 테다. 벽을 세우거나 거리를 두겠다는 말이 아니다. 함께하는 시간 이후의 다른 서글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계산하겠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이 사람이 지나온 역사를 존중할 것이며, 무엇보다 내가 정확히 알 수 없는 것들을 오만한 독단으로 재단하지 않을 거라는 다짐 혹은 약속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진 믿음의 두께를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굳이 따지면 신뢰가 견고함에 가까움을 느낀다. 언젠가 이 사람과 서로의 지난 상처와 아픔에 대해 이야기 한 적 있었다. 어떤 노래 가사처럼, 내가 생각해도 나 스스로가 썩 평범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 평범하지 않은 나를, 적확히 말하자면 조금은 아프고 지친 나를, 이 사람은 '괜찮다'라는 말로 어루만져 주었다. 나는 그 사람의 지난 역사와 주저함에 역시 '상관없다'라고 답을 했다. 기쁨은 나눌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슬픔과 아픔은 누군가에게 전이만 될 뿐 그 둘을 공유함으로써 정도가 경감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슬픔은 오로지 개인의 몫이다. 나는 무언가 이 사람에게 슬픈 일이 벌어졌을 때, 그때 그 사람의 마음이 내려앉는 붕괴의 공포에 대해 철저히 무지하며 앞으로도 알아낼 도리가 도무지 없다. 그건 아파하는 나를 보는 그 사람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확히 헤아릴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해 섣불리 조언하거나 단정 짓는 건 되려 폭력이다. 나는 그 사람이 삶의 폐허에서 한껏 움츠려있을 때 꼭 조용히 안아줄 것이다.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하며, 소리 내어 우는 그 사람의 등을 토닥여 줄 테다. 그 사람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비슷한 온도의 마음을 가진 그 사람의 '괜찮다'라서, 참 다행이다.


    우린 참 유치하며, 실없고 철없는 대화와 장난 그리고 농담을 즐긴다. 철듦의 정도가 미숙해서가 아니라, 서로에게라면 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주어도 괜찮겠다는 고마운 확신이 들어서다. 우린 서로의 모습을 담은 영상과 사진을 자주 찍는 편이다. 이 사람을 만나고 집으로 오는 길에 그날의 사진과 영상을 복기하다 보면, 아주 가끔은 행복에 겨운 내 모습을 발견할 때도 있다. 행복한 내 모습은 나조차도 낯설고 어색하다. 하지만 절대 밉지 않다. 되려 이런 표정을 짓게 해 준 그 사람에게 고마울 뿐이다. 이렇게까지 활짝 웃을 수 있었음을 민망히 깨닫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분명 우리에게도 난관이 찾아올 것이다. 역경 없는 삶은 없다. 사랑에도 생명이 있어서, 우리가 나누고 있는 무언가에도 모질고 추운 겨울이 애석하게도 분명 방문할 테다. 누구로 또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난관이든, 우리가 슬기롭게 잘 이겨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일지에 대한 충분한 대화가 미리미리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없이 얘기될 실없고 철없는 얘기들 중에, 서로를 '우리'로서 지켜낼 언어와 감정 또한 활발히 교류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영화 <꿈의 제인>의 대사를 조금 따라 하여, 우리가 '죽지 않고 오래오래' 유치하게 살 수 있고 살아내고 있기를 바란다. 나이가 들어도 실없고 철없는 우리의 대화가 꾸준히 이어졌으면 하는 소망이다. 그래서 내년도 내후년에도 그 이후에도까지 삶이 마련해 준 우리들의 거처에서 여전히 두 손을 잡고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부디, 둘만의 볼품없는 '섬'에서, 넘실거리는 '빛의 파도'에 맘껏 취한 채 여전히 서로에게 '괜찮다'를 건네는 우리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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