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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emian Writer Feb 20. 2024

<느낌의 공동체>

완벽한 이해란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지만,

한 사람을 열렬히 독서하기


    내가 지금의 옆 사람에 대해 아는 건 무엇이 있을까.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만 매운맛에 그리 강하지는 않는다는 반전. 오르막길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성향에서 비롯된 약한 기초체력. 원하는 게 있을 때 특히 더 애교가 많아지는 귀여운 기회주의적 화법. 이 정도면 한 사람에 대해서 적게 아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것들을 아무리 조각조각 모은들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잘 안다'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니, 나는 끝까지 이 사람에 대해서 세상에서 가장 무지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 더 적확히 말하자면 가장 무지하다는 말도 안 되는 진실이 결코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 그건 무관심이 아니다. 앎의 목표치와의 결여를 채워가기 위해 부단히 동기부여 하는 걸 멈추지 않겠다는 다짐의 표현이다. 우리 사이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이 사람을 열렬히 읽어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을 읽어가고 싶다는 건 비단 '알아가고 싶다'의 포장 좋은 비유가 아니다. 한 사람은 그 자체로 방대한 세계고 역사다. 하루하루 한 시간 한 시간이 서로 덧대어주며 지금의 그 사람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행간이 궁금했다. 어떤 사소한 순간들에 지금의 이 사람이 이루어졌을지 또 이 사람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어떤 세계가 탄생하게 될지 모두 탐독하고자 했다. 읽어갈수록 빠져드는 과거이자 벅찬 미래였다. 이 사람에 대해 오래도록 가장 무지하고 싶다는 말은 영원한 타인으로 지내겠다는 말과 등가의 언어로, 지난 발걸음과 앞으로의 지향점을 멋대로 재단하지 않고 언제나 존중하고 살피겠다는 약속이다.


    서로가 서로가 되지 않는 이상 누군가에 대해 '다 알았다'라고 자신하는 것만큼 어리석고 섣부른 오만은 없다. 물론 이를 오만이라 자신 있게 칭하는 나 또한 언젠가는 무척 오만했던 적이 있었을 테다. 세월은 제멋대로 흐르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남긴다. 지난날의 독단을 자각하고 너무도 부끄러웠던 나는 시간이 지나며 과거의 실수를 다시 범하지 않기를 경계하게 되었다. 괜히 '때'라는 게 중요하게 작용하는 게 아니다. 최소한의 염치라도 지닌 지금에서야 이 사람을 만나게 되어 다행이다. 한 사람을 읽어가는 데 있어서 마지막 페이지는 없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마치 아주 긴 영화의 15분짜리 요약본을 보고 '좋은 영화였다'라고 평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게 된 셈이다. 서툰 평론가지만 그래도 영화에서 눈을 떼지 않을 것이다. 조명이든 미장센이든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그럼에도 하나라도 더 발견하기 위한 노력에 충실하고자 한다. 더 알아가겠다는 말은 더 예민해지겠다는 말과 같다. 작은 신호에도 이 사람의 슬픔을 눈치채고 싶다. '다 알았다'라는 말을 회의하게 되며 나는 '이해'를 조금 평가절하하게 되었다. '완벽한 이해'에 근사하려는 노력은 분명 의미 있지만 그 완벽함이라는 게 단 한 번이라도 실현 가능한 목표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누군가가 아파하고 괴로워할 때, 내가 먼저 할 일은 주섬주섬 알량한 지식의 조각들을 수집하는 게 아니라 어깨와 품을 내어주는 행위라 생각한다. '완벽한 이해'보다는 '알맞은 위로'를 늦지 않게 제공하고 싶다.


    그렇다고 이해로 도달하려는 최선이 아예 무의미할 리 없다. 이해와 위로가 아직도 너무도 남발되는 MBTI의 T와 F와 같은 상극의 영역을 대변하는 무언가도 아니다. 둘은 되려 서로가 서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보완재들이다. 위로 없는 이해는 차갑고 반대의 경우는 공허하다. 서글픈 이분법 대신 치사한 양비론을 택하겠다. 하지만 무너지는 한 사람을 지탱하는 건 위로의 역할이 조금 더 크다고 생각한다. 선후의 차이는 있을 테고 난 먼저 이 사람의 지지대가 되고 싶다. 내가 든든할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나 역시도 한 사람이 가진 슬픔의 무게에 휘청일 수도 있다. 그래도 우선은 안간힘을 써서라도 이 사람이 주저만 앉아 있지 않게 하는 게 먼저다. 그게 위로의 의미다. 안아주고, 맘껏 울어도 된다고 달래줄 것이다. 그런 다음 이 사람에 대해 읽어나간 기억의 파편들을 모아 이해를 시도할 테다. 모으고 모아도 한 사람을 이루기에는 너무도 모자란 파편들을 그럼에도 부스러기까지 악착같이 모아서 이 사람을 헤아려 볼 테다. 헤아림은 신중해야 한다. 헤아림의 결과가 언제나 오답임을 인지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 사람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단서들을 동원한들 그 방정식의 값은 정답과 거리가 멀 테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사람과 나는 타인이니까. 이건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담백한 사실 그대로의 사실이다. 그렇지만 '더 알맞은 위로'를 위해서는 헤아림의 작업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읽어나감을 포기하지 않으며 속단하지 않는 헤아림은 위로를 더 단단하고 따뜻하게 할 수 있다.


    세상에 완벽한 이해가 어디 있겠는가. 누군가가 나를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말을 하면 난 그 끔찍한 허황에 되려 한 걸음 물러나며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고 손사래 칠 것 같다. 삶이 추울 때 내가 느끼는 체감온도에 대해 어떻게 다른 이가 정확히 서술할 수 있을까. 이는 타인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완벽한 이해 따위는 없다는 식의 체념과 자조에서 머무를 필요는 없다. 한 사람을 그럼에도 계속 알아보겠다고 아등바등 노력한 시간은 더 알맞은 위로로 치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어쩌면 사랑의 구체적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이해와 위로는 사랑을 이루는 핵심적인 감정 형태소일 수 있다. 이해의 작업을, 즉 한 사람에 대한 독서를 게을리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 따스하고 듬직한 품을 짓기 위해 이해는 뼈대 작업과도 같다. 완벽한 이해에 영원에 미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계속 이 사람을 읽어나갈 이유다. 삶은 종종 모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모질다. 이젠 좀 그만 모질어도 되나 싶을 때조차 삶은 기대를 종종 배반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며 위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해를 위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나는 어쩌면 지금의 연인에 대해 참 많은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겸손할 것이다. 그리 겸손하게 태어난 성품은 아니지만 최소한 이 영역에서 만큼은 언제나 초심자의 마음으로 임하며 이 사람을 계속 읽어나갈 테다. 삶이 너무 모질어 이 사람이 비틀거릴 때, 단단히 지은 뼈대 위에 얼른 거처를 완성하여 이 사람을 안아주는 품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한 번의 겨울이 가고 있다. 겨울비가 내리지만, 더 이상 이 비가 눈으로 바뀔 정도로 춥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날이 많이 풀렸다. 어쩌면 봄의 초입이라고 해도 무방할 날씨일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이 생에서 느끼는 감정에도 계절이 있다. 겨울뿐인 세상에 봄을 가져다줄 능력은 불행하게도 내게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마음에 혹한기가 찾아온 누군가에게 체온을 전하며 안아주는 무력한 행위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 단 한 사람 정도는 말이다. 그 무력한 행위가 그럼에도 미약한 온기라도 지닐 수 있게, 난 이 사람을 독서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비록 완벽한 이해란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딴 진실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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