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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emian Writer Mar 03. 2024

우리 삶엔 '다음'이 있잖아요

슬픔의 지지대


    '우린, 다음 영상에서 만나요'


    무심히 보던 영상의 마지막 자막이었다. 최근 자신이 느낀 슬럼프를 고백하고 이에 대한 담담한 소회가 내용의 주를 이루었다. 나 역시 그리 무탈하지만은 않았던 요즘이었기에, 그래도 세상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또 한 명은 있구나라는 마음으로 가볍게 영상을 시청했다. 그러다 영상의 말미에 '우린, 다음 영상에서 만나요'라는 자막을 보고 왠지 모를 위안을 받았다. 다음이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영화 <컨택트>에서 헵타포드들의 언어와 시간은 원형을 이루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지구의 인간이고 따라서 내 시간은 선형적이다. 직선의 방향은 탄생부터 죽음까지로 이어지며 그러니 나는 살아있는 동안 꾸준히 매 순간 죽음에 근사해진다. 어쨌든 살아있는 매 순간은 '다음'으로 죽음에 가깝게 발을 내딛는 셈이다. 다음으로의 전진은 그런 의미에서 삶의 관성이다. 호흡함에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나의 살아있는 시간은 자동적으로 숨을 쉼을 통해 다음을 향한다. 이 역시 관성 덕분이다. 마음이든 몸이든 어딘가에 고장이 났음을 인지하게 될 때는, 이토록 자연스러운 관성적인 호흡마저 조금 어색하게 느껴질 때다.


    '다음'이 있다는 게 너무도 끔찍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다음에 대한 두려움 또한 종종 증폭된다. 오늘과 같은 하루가 내일도 그대로일거라는 불안, 오늘의 나와 비교하여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삶을 살거라는 슬픈 확신, 그리고 가끔은, 이 삶에 '다음'이 굳이 필요할까라는 의문이 들고는 한다. 삶을 지탱하는 건 추억과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희망은 다음과 강한 연결 고리를 가진다. 희망없는 다음은 잿빛이다. 폐허같은 삶을 관성으로 버티기에는 버거울 때가 많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누구도 모른다. 엄청난 기술과 데이터를 동원해도 틀릴 수 있는 게 내일의 일기예보다. 날씨도 이런데, 삶의 측면에서 내일에 얼마나 변수가 많겠나. 그러니 내일을 미리 재단하고 단정짓는 건 어리석은 행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기했듯 우리의 삶은 선형적이며, 지난 하루에 다음 하루를 포개며 삶은 이어진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경험치와 그로부터의 데이터가 있는 것이다. 적지 않은 날들을 견디고 살아왔기에 우린 꽤 높은 적중률로 '다음'을 그릴 수 있다.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있지 않는 이상, 과거 데이터들로부터의 산출값은 대부분의 경우 얼추 정확하다. '도저히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의 발생도는 빈번하지 않다. 그러니 내일의 삶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다.

중요한 건, 희망

    예측의 결과가 언제나 기대와 희망이면 좋겠지만, 슬프게도 좌절과 절망만이 선명할 때가 있다. 문제의 이의 지속이다. 아주 낙천적인 사람도 자신의 모든 하루하루가 행복에 겨울 수는 없다는 걸 잘 알 것이다. 다만 '언젠가는 나아질 거야'라는 믿음이 불행과 불안에 대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삶이 고장날 때, 슬프게도 그런 믿음 또한 흔들린다. 다음에도 더 나아질 게 없고, 되려 같은 좌절과 절망이 이어지거나 악화될거라는 예측값만 보인다. 이런 의문과 회의의 반복은 굳이 내게 있어 '다음'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더 고통스러울 일들이 대부분이라면. 혹은 현재의 아픔이 아무리 봐도 치유되기 어려울 것 같다면. 어쩌면 숨을 쉬고 있는 게 그리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않는다면. 도대체 사람은 왜 다음을 준비하고 살아내야 할까라는 아픈 물음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가끔은, 그 다음 따위는 결코 없는 게 나을 거라는 자조로도 이어진다. 우울의 굴레일 수도, 박탈된 희망일 수도 있다. 요즘의 나도 이런 의문을 자주 되뇌고는 했다. 당연한 다음이 무서웠고 굳이 이를 향해 살아내고 싶지가 않은 순간들도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보게된 '우린, 다음 영상에서 만나요'라는 자막이었다. 슬럼프와 권태를 나처럼 느끼고 있던 누군가가, 그래도 자신에게는 '다음'이 있다며 나를 위로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게 강박과 강요가 아니었기에, 덕분에 조금의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세상 모든 상처와 절망이 극복가능하지는 않다. 극복을 해내려는 모든 시도들이 성공일 수도 없다. 패배와 실패의 경험은 자연스레 누적된다. 그러다가 어느새 극복에 대한 열의까지 상실해버리는 순간도 도래한다. 극복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든다. 버티고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그보다 더 큰 용기를 내어 아예 모든 걸 포기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찾아올 때도 많다.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다음'이 되는 셈이다. 영화 <꿈의 제인>은 죽지 말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여기 뉴월드에서 만나자며 마무리 된다. 죽지 않고 버텨야 할 명확한 이유를 찾을 수 없던 최근이었다. 그러다 보게 된 영상에서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다음 영상'에서 만나자는 말이 나왔다. 삶을 힘들어하는 누군가가 '다음'을 얘기하기가 마냥 쉽고 의례적이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받게 된 작은 위안이었다. 나같은 사람도, 어쩌면 언젠가는 '다음'을 자연스레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영상과 자막 하나를 보았다고 바로 당장 나의 삶이 기쁨으로 충만해지지는 않을 테다. 그러나 슬픔과 절망에 잠식되고 있던 생에, 아주 작은 지지대 하나를 붙일 수는 있었다. 미약하지만 소중한 희망이다. 이 작은 희망이 힘없이 꺼져버릴지 아니면 다시 꽃을 피울지는 모른다. 다만, 지금 당장은 '다음'이라는 게 그리 어색하거나 불편하게만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어쨌든 지금 내게는, 조그만 희망이 하나 생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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