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다섯, 스물 하나>

나의 한 시절이 되어준 그대

by 사랑의 천문학

살뜰히 챙겨본 드라마는 아니었지만, 평소 좋아하는 노래 제목과 같아서 늘 궁금은 했었다. 가슴 뛰게 만난 첫사랑과 서툰 시간을 보내고, 헤어졌다가, 우연히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이 더 어른스러워진 사랑을 하고 내일을 약속하는 결말은 아니었다. 둘이 백년해로를 약속하며 이어지지 않은 것에 시청자들의 아쉬움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마지막 사랑이 아닌 세상 모든 사랑은 이별로 귀결된다. 그 정확한 퍼센티지를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이별이야말로 대부분의 연애가 공유하는 보편으로서의 결말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영원할 것 같다는 착각도 또 영원하자는 맹세도 어느 날 어떤 사유로든 바로 앞에 당도해버린 이별에 무력하다. 이별은 분명 해피엔딩은 아니다. 아니, '해피'하려면 '엔딩'이 없어야 하니 사랑의 '해피엔딩'을 찾는 건 어쩌면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상 모든 이별이 무조건 새드엔딩이라는 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물론 헤어짐은 슬프다. 더없이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과 남이 되는 것인데, 여기에 슬픔이 수반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결말이든 사랑했던 두 사람이 나눈 시간과 이야기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해피인지 새드인지는 마침표가 아니라 그 문장 전체에 대한 피드백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아름다운 영화보다도 더 찬란한 이야기를 써냈을, 서로 많이 사랑했던 두 사람일 것이다. 나는 종종 사랑을 연극무대에 비유하고는 한다. 평범하고 초라한 1인극으로 시작한 연극에, 어느덧 나만큼이나 중요한 상대 배역이 나타나는 게 바로 사랑이다. 말하자면 이 밋밋했던 삶의 또 다른 주인공이 나타난 셈이다. 어떨 때는 중요도가 전도되어 이 사람을 중심으로 나의 일상이 공전하기도 한다. 그렇게 연인이란 나만큼 중요하고 때로는 나보다 중요하게 되는 사람이다. 두 사람의 시작에서는 분명 서로 사랑을 고백하며 처음 손을 잡는 순간이 있었을 테다. 손을 잡는 행위는 한 사람의 역사에 방문하는 일이다. 어떤 노래 가사처럼, 그 손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짓고 무너뜨렸을까. 그 지리멸렬한 역사가 고이 묻은 손을 꼭 잡으며, 두 사람은 서로의 삶에 '개의'하는 사이가 된다. 연인이 된 두 사람은 서로의 삶에 방문하며 가장 내밀한 비밀들을 나누고 더없는 행복을 누린다. 모든 사람은 공평하게 언젠가 죽게 되지만, 이제 막 울음을 터뜨린 작은 아이에게서 생명의 유한함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이별이 얼마나 횡행하는지 알고 있더라도 이 사람과의 사랑만큼은 예외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철없고 미련한 상상과 희망을 하고는 한다. 사랑은 그토록이나 벅차고 행복한, 그리고 꿈같은 일이다. 그러나 모든 꿈이 그렇듯, 그 꿈에서 깨야할 때가 언젠가는 찾아온다.


평생을 모르고 살던 두 사람이 만나 연애를 하고 세상에서 가장 깊고 소중한 마음을 주고받는다. 두 사람의 천진한 얼굴과 마음은 참 티가 없이 예쁘다. 그토록 예쁜 미소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이지만, 극히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헤어짐의 길을 걸어야 한다. 나란한 발걸음이었고, 때로는 같은 발로 걷기 위해 누군가는 잠시 기다리고 다른 누군가는 서두르기도 했을 만큼 함께 손을 잡고 걸어온 소중한 길일 텐데, 그 길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건 대부분의 경우 이별이다. 두 사람 간의 시간이 막을 내리는 셈이다. 때론 즐겁게 또 때로는 벅차게 걸어온 길의 끝에 있는 게 고작 작별이라는 건 참 믿기 힘든 진실이다. 함께 했던 연극의 한 챕터가 그렇게 끝나고 다시 이 작품은 1인극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이토록 슬픈 결말을 맞이했다고 하여, 그동안 걸어온 발자국들을 부정하고 무의미하다 여기는 건 어쩐지 조금 안쓰러이 안타깝다. 이별이 무척 힘들겠지만, 만남에서 이별까지의 여정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누군가와 그 걸음걸음을 함께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사이가 되었지만, 대신 마음 안에서 따뜻한 온기로 지나온 생일 비추고 있는 햇살 같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한 사람의 기억 안에서만 오래도록 머무르는 게 어떤 소용이 있나 싶을 때도 있지만, 그 사람과의 시간을 통해 배우고 느낀 것들로 더 나은 사람이 될 소중한 기회를 얻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세상에는 모진 이별도 있다. 나쁜 이별도 당연히 존재한다.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진저리를 치며 헤어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사랑이 그렇듯 이별의 모습도 제각기 다르다. 하지만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처럼, 사랑의 기억은 곱씹을수록 따뜻하고 되려 잊고 싶지 않은 추억들이 더 많이 떠오르게 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에 대해 단순히 '기억 속에서 미화된 과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별로 인해 비롯된 성장통이 비로소 한 단계가 끝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원망 혹은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만 들고 이딴 기억 따위라며 지난 시간을 부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손길은 조금은 따뜻해서 다소간의 시간이 흐른 뒤 사랑을 복기하면 애틋하고 아련한 추억들이 보다 더 선명히 보이기 시작한다. 상대로부터 얼마나 고마운 마음을 받았는지도 이때 즈음 깨닫게 된다. 왜 그때 그렇게 모진 말을 해야 했는지 자책에 마음이 쓰이고, 더 나은 사랑을 할 걸, 그리고 더 괜찮은 이별을 할 걸, 이런 후회도 피어난다. 진심 어린 사랑과 그럼에도 헤어져버린 이별을 통해 한 사람의 성장은 이루어진다. 그렇게 가슴 아프게 배운 사실을 이미 멀어진 상대방에게 다시 더 어른스러워진 마음을 줄 수 없다는 건 조금의 아이러니지만, 이 덕에 다음 사람과는 보다 더 정확하게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


드라마의 제목은 <스물다섯, 스물하나>였다. 스스로는 다 컸다고 생각할 나이지만 실은 여전히 많이 미숙하고 어리다. 작중 두 주인공은 조금 더 자란 어른이 된 후에 만나 함께 미숙했고 서툴렀던 지난날을 긍정했다. 아픈 이별의 기억을 성숙하게 소화한 것이다. 많이 힘들어하고, 눈물도 아낌없이 흘렸을 두 사람일 테다. '처음'이라는 것에 그리 의미부여를 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랑의 감정을 처음으로 느끼게 했던 첫사랑이었으니 더 마음이 찢어지고 찾아오는 슬픔에 무방비했을 두 사람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이를 시작으로 두 사람은 나이를 거듭 먹으며, 그렇게 또 상처를 주고받으며 아마 더 단단한 어른으로 성장하지 않았을까. 참 예쁘게 함께 시간을 나눈 두 사람에게도, 사랑했던 시간의 끝이 찾아왔다. 이들 역시 두 사람의 관계가 헤어짐이라는 보편적 운명 앞에 예외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한 사람의 생은 어쩌면 과거 경험들의 복잡한 방정식의 산출 값일지도 모른다. 이들에게는 밝게 빛났던 지난날이 있다. 어느 때보다 계산 없이 또 마음을 재지 않고 사랑했던 기억이 두 사람에게 모나거나 모질지 않게 남아있게 되었다. 끝나버린 사랑이라도, 언젠가 자신의 삶이 누군가와 함께 더없이 빛났다는 건 참 소중한 기억 자산이다.


사랑이 끝났지만, 이들을 지켜줄 온기를 머금은 추억이 생겼다. 결국 한 사람을 지탱하는 건 추억과 희망이라고 했을 때, 설사 희망이 무너져도 이들이 기댈 곳이 있다. 한 사람이 힘에 부쳐 삶을 돌이켜보았을 때 스물 어떤 날의 시간이 따뜻하게 미소 짓고 있기를. 그렇게 돌아온 길에 우리 또한 밝게 오른손을 흔들며 안녕을 고할 수 있기를. 그렇게 웃어줘서 고마웠다고, 덕분에 나도 예쁘게 웃을 수 있었다고. 사랑이 끝나면, 그리고 사랑이 끝나도, 최선으로 사랑했던 시절은 한 사람을 따뜻하게 감싸준다. 그러니 이 이별에 마냥 새드 엔딩이라는 딱지를 붙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더 이상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덕분에 서로가 자라고 위로받을 수 있는 시절이 찬연하게 반짝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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