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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emian Writer Mar 11. 2024

볼빨간사춘기, '나의 사춘기에게'

그때 누군가 나를 안아줬다면

    어차피 다시 누워 어지러워질 침대를 왜 각을 잡아서 정리하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던 때가 있었다. 책상은 긴 반면 공부할 때 보는 내 시야는 한정적이니, 그 외 책상 위 영역들에 내가 뭘 어떻게 올려놓는지에 대해 왜 잔소리를 하는지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우선 내 방이고 내 소유인 것들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 자체부터가 그때의 내게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때론 이해해 보려고도 시도했다. 아무래도 잔소리를 하루라도 하지 않았을 시 자식을 엇나가게 한다는 죄책감이 들어서인 것 같다고 말도 안 되는 추측도 해보았을 정도였다. 나는 그렇게 사춘기를 정통으로 맞았다. 에어백이 터질 틈도 없이 사춘기는 나를 집어삼켰다. 문제는 나는 내가 사춘기인 줄 몰랐다는 점이다. 어쩌면 사춘기는 술과 닮아, 많이 마시고도 취하지 않았다고 말하듯이 사춘기 역시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끊임없이 해명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지켜보는 사람들만 고생시킨 것 같기는 하다. 사춘기에 걸린 나는 세상이 밉고, 세상이 싫었다. 있는 힘껏 '제도 내'에서 최대한의 반항을 했다. 성적도 조금씩 떨어졌다. 좋아하는 사람도 처음으로 생겼다. 감정과 이성의 세계 모두 넓어지는 데, 여기에 선을 그으려는 시도들과 매번 마찰과 갈등이 있었다. 그러면서 난 정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지랄 맞은 사춘기를 보내게 되었다.


    나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밟고 있던 친구들과 비교가 되었다. 그들 대다수는 큰 증세 없이 사춘기가 지나가거나, 아니면 잠시 머물렀던 사춘기를 떠나보내고 흔히 말하는 '철들기'가 가능한 삶의 단계로 곧바로 진입했다. 일일이 그 속을 들여다보지는 않아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피상적인 판단만으로도 내가 중증 사춘기에 걸렸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나의 망할 놈의 사춘기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고, 이후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땐 주위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나 스스로에 대한 이해도가 현격히 떨어졌다. 앞두고 있던 고등학교 입시 생각에, 사춘기가 도래하며 다소 추락해 버린 성적 복구 걱정에만 매몰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심리 상담을 받으며, 어쩌면 내가 사춘기를 잘 보내지 못했다는 게 현재 느끼는 감정들의 시초일 수도 있겠다는 분석을 들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예민하다. 감수성도 조금은 풍부한 편이다. 이 둘은 좋다 나쁘다의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 조금 마음을 놀라게 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건 그저 타고난 기질일 뿐이다. 기질을 평가 대상으로 삼아 너는 왜 이러냐고 물어보니 내가 할 말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예민함과 감수성은 가치 판단의 법정에서 피고가 되어 모난 소리들을 들을 이유와 필요가 없는 '기질'들이다. 하지만 나도 그랬고 주위 사람들도 그랬고, 그 당시 예민함과 감수성은 되려 삶의 방해물처럼 취급됐다.


    그 예민함과 감수성을 조금 더 살뜰히 또 조심히 보듬을 수 있었다면, 어쩌면 사춘기 이후의 삶도 지금과는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라는 미련 아닌 미련이 있다. 지금 삶이 최악이라는 것까지는 아니다. 물론 종종 우울에 빠지고 스스로의 존재 이유에 대해 자꾸 질문하는 버릇이 있지만, 그래도 삶의 지지대가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현재의 삶에 만족하냐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아니요'다. 난 굳이 이토록 자주 나의 존재 이유를 탐구하고 싶지 않다. 그런 생각조차 안 하고 주어진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고만 싶을 뿐이다.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하기에, 나는 슬픔이든 분노든 감정들을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이 또 깊이 느끼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때때로 그 느낌의 결괏값이 자기 비하나 위축됨 혹은 열패감 등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나는 자책을 많이 한다. 어떤 일들에 대한 원인을 나의 무능력함에 자주 귀인시킨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어떻게 잘할 수 있겠냐는 다독임에는, 그럼에도 나는 잘했어야 한다며 열렬히 반박하고 나를 증오한다. 열심히는 필요가 없고, 열심히 했다는 노력은 무엇도 남기지 않는다는 게 평소 생각이다. 남는 건 결과뿐이며 실패는 오로지 나의 부족함 때문이라는 사고방식이다. 스스로에게 조금 가혹한 것 같지만, 나는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방법에 대해 무지하다. 예민함과 감수성으로 때문에 슬픔이나 아픔이 높은 빈도로 찾아왔지만, 이를 맘껏 느끼고 맘껏 아파할 시간을 부여받은 적이 없었다. 당면한 과업 앞에서 예민함과 감수성은 지양해야 할 태도라고까지 여겨졌다.

    누구나 한 번의 인생을 산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한 인생에 한해서는 단 한 번만 사는 게 지극히도 당연한 1:1 대칭이며 여기에 예외는 없다. 지난번 삶의 기억을 끌어와 이번 생을 지혜롭게 산다는 사람도 허황되고 과장된 말들 속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도 내 인생이 처음이고, 부모도 부모로서의 삶은 처음이다. 다른 주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 서툴 수밖에 없다. 유별나게 교육에 진심이었던 동네에서 나의 유년시절을 보냈던 것도 나와 주위 사람들의 마음의 여유를 어느 정도 박탈했을 것이다. 높은 수준의 예민함과 감수성을, 그저 사춘기 시절 잠깐 내비치고 말 무언가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서투르고 어리숙하니 그 중요성을 바로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고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사춘기 때 비로소 나의 기질들이 발현한 셈이었다. 틀렸다고 단죄하기 전에, 좀 다르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불행하게도 모두에게 없었다. '네가 어떻든 어떤 상황이든 정진해야 한다'라는 메시지만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나 스스로도 나의 예민함과 감수성을 병리화 했다. 타고난 기질을 애써 눌렀다. 이에 대해 한껏 죄악시했다. 그래서 서른이 된 지금도, 예민함이 작동할 때면 여지없이 나를 탓하는 신호음이 마음 안에서 시끄러이 울린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상담사의 말을 들었지만, 이미 꽤 오랜 시간을 이렇게 지내와서인지 쉽게 고쳐지지는 않는다.


    좋아하는 밴드의 노래 가사에, '우린 달랐을 뿐, 잘못되진 않았어'라는 구절이 있다. 현재 나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난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예민하고 감수성이 높은 소년이었을 뿐이었다. 그건 잘못이 아니었다. 태어나고 자란 게 그렇게 이어졌을 뿐이다. 예민하고 감수성이 높아서, 때론 더 아플 때도 있지만 반대로 세상의 경이에 더 깊이 감동할 때도 있다. 더 상처에 취약한 건 사실이고, 이때 주위에서 이 점을 고려하여 나를 보듬어줬다면 내가 나를 미워하게 되는 회로 정도는 고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안타까운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시간은 지난 시간에 그치지만, 지난 시간에 느낀 상처들과 감정의 여파까지 모두 지난 시간에 묻어둘 수는 없다. 이들로부터의 작별이 참 쉽지 않다. 종종 이 상처들에 발목이 잡혀 더 나아가지 못할 때도 있다. 어쩌면 나의 예민함과 높은 감수성은, 힐난과 질책보다는 따뜻한 한 마디가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수월하게 지난 시간이 남긴 상처와 아픔들을 잘 애도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도 저 노래 구절처럼 생각하려고 조금씩 노력하는 중이다. 그때의 나는 잘못된 게 아니라 달랐던 것이고, 그러니 지금의 나 역시 매번 모든 잘못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귀인 시키지는 않아도 된다고. 정확히 보듬어진 적이나 나를 다독였던 경험이 많지 않아 여전히 서툴지만, 다름과 틀림은 분명히 다르다는 생각을 잊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참 고생 많았던 사춘기였다. 팽창하는 세계에 한계를 그으니 옆으로 엇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 받거나 듣지 못했던 얘기들이 못내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타고난 기질들로 더 많은 걸 온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며 앞으로의 날들을 걸어야지. 다만 그러다가, 삶의 어느 그늘진 구석 자리에서 홀로 자괴감에 울고 있는 누군가를 마주친다면, 그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넬 수 있는 여유 정도는 갖출 수 있기를 내게 바란다. 나의 예민함과 감수성이 알맞게 발현되어, 한 사람의 상처에 최대한 공감하려 애쓰고 그 사람을 안아주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되면 나도 나의 예민함과 높은 감수성을 지금보다는 긍정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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