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hemian Writer Oct 09. 2023

고장 난 키보드에 빚진 삶

우울증으로부터 조금씩 덜 아파지는 중입니다.

    되도록이면 가장 적확한 말을 고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서 미안할 때는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고마울 땐 고맙다고 말을 한다. 특히 '사랑해'라는 말로 미안함이나 고마움을 편리하게 대신하려는 행위를 조금은 필요 이상으로 경계한다. 듣기 좋은 말이니 최대한 남용해도 괜찮을 듯 하지만, 오히려 한정된 상황에서의 사용이 그 의미를 깊이 밝힐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정확한 문장들로 나의 글이 구성되기를 바란다. 글쓰기를 몇 년 하면서, 쓰여질 수밖에 없는 문장들을 빼곡히 옮기는 게 겨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언젠가부터의 생각이기도 하다. 나는 글을 짓지 않는다. 다만 그 위치에 절대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문장을 발견하려 애쓸 뿐이다. 내게 있어서 글쓰기란 창조보다는 탐색에 가까운 행위다. 제 곳에 적확하게 쓰이거나 놓인 단어와 문장들로 이루어진 말과 글들을 아낀다. 물론 말이나 글이나 모두 정답이 있는 영역은 아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답은 있다. 오답을 가까스로 피하며 존재하지도 않는 정답에 근사하려 애쓰는 행위가 바로 말하기와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탐색을 하려면 동기가 필요하다. 세상에 별 호기심이 없는 내가 글을 쓰거나 말을 함에 있어 가장 어려움을 많이 느끼는 부분이기도 하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지켜본 지가 벌써 꽤 되었다. 이젠 사실 감흥을 느끼기가 힘들다. 생활에 안정이 찾아오면서 더욱 그렇게 변해버린 느낌이다. 그저 너무나 치기 어려 보일 정도로 모나고 뾰족했던 시간과의 작별이 나도 모르게 이루어졌다. 처음 글을 열렬히 써대던 때와 대비하면 참 많은 것들에 둔감해졌다. 세월의 빌어먹을 힘이다. 그땐 자주 아팠다. 그리 강하지 않은 바람에도 풀썩 쓰러졌다. 기대가 컸고 그만큼 크게 실망하고 절망했다. 좌절도 이어졌다. 무너짐은 끔찍했다. 그때 글쓰기에 기대 내 삶을 지탱했다. 유서까진 아니었어도 마음의 상처에서 묻은 피로 힘겹게 써낸 구조 신호였기도 했다. 아프다고, 사실 정말 너무 아프다고. 나 이렇게나 괴롭다고. 그러니 좀 안아달라고. 누구를 향해 보낸 신호였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썼다. 게걸스럽게 글을 쓰고 또 썼다. 개전 날 호외처럼 요란스럽게 글을 뿌려댈 용기는 없었다. 하지만 누구라도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염원했다. 바람은 바람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세상은 내 간곡한 청을 거듭 반려했다. 거절 사유는 지금도 모르겠다.


    외로웠다. 그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두 괴물은 열패감과 자괴감이었다. 제 때 제 곳에 놓인 문장과 말을 좋아하듯, 제 때 제 곳에서 제 역할을 하는 삶을 간절히 꿈꿨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고 한다. 틀렸다. 늦은 나이는 분명히 있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는 말들도 있지만, 때론 너무 많은 행들의 설명이 하나의 숫자에 담겨있기도 한다. 숫자는 생각보다 많은 걸 알려준다. 제 때를 놓쳐버렸다는 자괴감이 심했다. 무엇하나 되는 게 없다는 열패감은 사람을 미치게 했다. 부족한 건 나인데, 세상이 미워졌다. 단절의 벽을 열심히 세워 스스로를 가뒀다. 웃긴 꼴이었다. 자기가 자신을 제한한 주제에 외롭다고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허름한 외로움의 벽 이외에 내가 기댈 곳은 마땅히 없었다. 견고하게 짓지도 못한 벽이라 여기저기가 부서지고 붕괴됐으며 무너지고 말았다. 제 곳에서 적확하게 제 의미를 역설하는 분명한 삶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캐물었다. 이쯤 되면, 나 자신이 되려 잘못 쓰인 문장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가졌다. 'Delete' 버튼을 내 삶 앞에서 누를지 말지 몇 번을 고민했다. 지금의 생명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장 나고 허술했던 그때의 삶의 키보드에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고장 난 키보드에 빚진 삶

    시간이 꽤나 지나, 나는 다행히 덜 아프게 살고 있다. '시간이 꽤나 지나'라는 상투적인 표현 안에 얼마나 많은 괴로움들이 있었는지는 생각만 해도 아득하다. 지랄 맞은 시간이었다. 이젠 통증에 무뎌진 건지 곪았던 병이 치유가 된 것인지는 둘 중 무엇이 정답이라 자신할 수 없다. 다만 어쨌든 다행히도 아픔은 덜하다. 세월의 빌어먹을 힘이라는 건 죽을 것 같았던 과거의 괴로움에도 죽지 않고 버텨낸 경험치를 의미한다. 그 경험치가 삶에 굳은살을 만들어준다고 믿는다. 죽지 않고 버텨내어야만 얻을 수 있는 굳은살이다. 부조리한 진실이지만 다른 대안은 없다. 꽤 시간이 흘렀지만, 자의든 뭐든 아직 죽지는 않았다. 죽지도 못했든 죽을힘도 없었든, 어쨌든 죽어버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있다. 지독히도 아팠던 날들을 거쳐, 그래도 덜 힘든 날들을 어떻게든 살아내고 있다. 나란 삶이라는 문장이 있어야 할 적확한 자리와 그 의미는 아직도 불확실하다. 여전히 스스로의 쓸모에 회의하는 날들이 많다. 다만 그럼에도 이전처럼 아픔에 열렬히 천착하지는 않는다. 삶이 재미와 기쁨 그리고 환희로 충만해진 것도 절대 아니다. 어떤 희망 또한 잉태되지 못했다. 담백하게, 그냥 아픔만 덜한 것이다.


    '감'과 '증'을 구분하지 못하는 서글픈 언어들이 배려 없이 난립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엄연한 질병 언어인 '우울증'의 귀책사유가 오직 모자란 의지와 노력이라는 인식을 마주할 때면 절망하기도 한다. 나는 우울증 환자다. '나는 우울증 환자다'라는 이토록 짧은 한 문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게 되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아픔이 부당하게 동원됐다. 기회가 있다면 인생의 법정에서 손해배상청구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다. 우울증으로 인해 놓치거나 놓아버려야 했던 것들에 대해 어떻게 보상해 줄 것이냐며 멱살을 잡고 따지고도 싶다. 그럴 수 없는 게 너무 억울해서 가끔 눈물이 날 때도 있다. 지난 시간이 한없이 가엾다. 그리고, 내가 안쓰럽다. 우울증으로부터 나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바스러질 듯 위태롭던 시간으로부터는 한 걸음 벗어난 느낌이다. 최소한 나를 안쓰러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야기되었는지 묻는다면, 나는 역시 아무 조언도 건넬 수 없다. '그냥 이렇게 됐다'라는 말만 서글프게 되뇔 뿐이다. 죽지 않고 살았더니, 너무나도 죽고 싶고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시간에 죽지는 않았더니 이렇게 됐다고만 덧붙일 수 있다.


    우울증을 겪으며 하나 다짐한 게 있다. 누군가의 아픔을 멋대로 재단하지 말자는 스스로와의 약속이었다. 자신의 세계의 한계에서 나의 병을 무례하고 짐작하는 이들을 보며 마음으로 느낀 다짐이었다. 통계를 들여다보지 않았지만, 우울증을 겪는 마음 아픈 사람들이 그리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중 일부는 예전의 나처럼 'Delete' 혹은 'Back Space'를 사용하여 스스로라는 문장을 세상이라는 글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나는 '죽지 마'라는 말이 일종의 강박으로 느껴진다. 너무 괴로워하는 누군가에게 그럼에도 견디라고 하는 게 되려 폭력적인 건 아닌지에 대한 의문도 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필요한 위치에 당신이라는 문장이 들어가 하나의 예쁜 글이 완성될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이딴 무책임한 말을 가급적 지양하는 게 적확히 말하려는 노력의 일부다. 눈을 딱 감고 'Delete' 버튼을 눌렀음에도 고장 났던 키보드 덕에 내 삶은 유지되고 있다. 그렇게 죽지 않고, 죽지 못해 살다 보니 그래도 아픔이 조금은 경감되었음을 '이제야' 아주 조금 느낀다. 힘내고 버티라는 말은 너무나 공허해서 내 입에서 말해질 수 없다. 다만, 고장 난 키보드에 빚을 지고 살고 있는 어떤 한 사람이, 그 이후로 살아봤더니 우울증의 괴로움이 조금 줄었다는 사실을 전달할 수는 있다. 여기엔 아무런 교훈이나 가르침이 없다. 그냥 현상 그대로의 진술만 있을 뿐이다.

    앓아봤기에 더욱 조심스럽다. 부단히 혼자가 아니라고 말을 들어도 그게 전혀 와닿지 않을 때가 많다. 누군가의 우울증이 나아졌다는 얘기를 들으며, '꼴에 간증하고 있네'라고 못나게 비웃었던 적이 내게도 있다. 어떤 게 정답인지에 대해서 나는 지금도 모르고 앞으로도 알 리가 없을 것이다. 다만, 아등바등 살아온 외로웠던 생 하나가, 이젠 삶의 통증들에 아주 조금 괜찮아졌다. 가감 따윈 전혀 없어 오직 진실뿐인 이 진실이 그래도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면, 그것만 돼도 참 좋겠다는 마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토록 안온하고 익숙한 불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