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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래곤스톤 Oct 01. 2023

[끄적 에세이-13] 자신만의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서로를 존중하는 방법의 대해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타인에게 맞춰 사는 것을 강요당하며 살아갔다. 적어도 아버지라는 존재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구사항이다. 그 요구사항에 충족하지 못하면 폭력이라는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타인에게 맞추지 못하면 폭력이라는 대가를 받을 거라는 두려움이 아직도 남아 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맞춰야 할 게 너무 많았다. 특히 독심술을 연마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표현력은 나를 폭력으로 안내하는 자리가 되었고 나는 항상 눈치를 보며 살아가야 했다. 이러한 습관이 당연히 학교생활은 물론 사회생활에까지 이어져서 나는 타인에게 맞추지 않는다면 폭력과 같은 대가를 치를 거라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나를 살펴볼 시간이 부족했고 항상 두려움 속에서 타인의 눈치만 보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나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허수아비였다.


지금도 타인의 눈치를 보고 맞춰주기 위해서 나도 모르게 행동하게 된다.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저절로 맞춰주는 것이 나에게는 고통이지만 의식하지 않으면 스스로 나는 남에게 맞춰주려고 한다. 


하지만 난 INTP다. 강요로 인한 습관으로 남에게 맞춰주려고 하는 무의식이 있지만 확실히 나는 개인주의적으로 설계된 창의적인 미친놈 같은 존재다. 공감도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 빠져 살기에도 너무 많은 시간이 할애되는 사람인데 남에게 맞춰 사는 인생을 강요당하니 당연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최근에야 내가 자취를 시작하고 내 시간이 생기면서 나를 살펴볼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살펴보고 타인과 나는 어떤 점이 다른지 스스로 분석하고 지금도 타인을 분석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타인의 성향을 빠르게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 생겼고 타인이 이해되면서 맞춰주는 것이 예전보다는 고통스럽지 않다. 내 시간이 생기니 오히려 타인에게 맞춰줄 수 있는 능력이 생겨버린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 사람의 인생부터 생각까지 읽을 수는 없고 겉모습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에 겉으로만 맞춰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오랜만에 브런치글을 쓰게 된 계기는 최근에 내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해외에 거주하던 친구가 한국으로 들아오게 되었고 나는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 우리 집에 생활을 하라는 권유로 시작해서 그 친구와의 생활이 시작됐다. 서로 성향이 정반대인 친구라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던 친구지만 오랜만에 봤다는 사실로 반갑게 맞이하고 집으로 초대했다. 직장도 구하고 있기에 내가 근무하는 직장에 취업을 시켜줌으로써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친구에게 사용할 환경이 되어 버렸다. 자연스레 내 시간이 사라지고 맞춰줘야 하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나는 점점 체력이 떨어져 갔다. 난 역시 개인주의적인 놈인가 보다.


개인주의의 반대는 이타주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이기적인 사람도 반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그 친구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생활을 행복해하는 사람인데 나는 반대로 내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시간을 함께하는 것에 초점을 둔 성향을 가진 친구에게 많은 시간을 투자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나는 내 시간을 뺏기고 있었던 것이다. 내 체력과 시간이 점점 줄어들면서 귀찮아하거나 함께 하기 힘들다는 표현을 할 때마다 나는 그 친구의 분노를 견뎌야 했다. 평상시에는 물론이고 내가 기존에 있던 생업이 존재하는 근무지에까지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나는 생업이었기 때문에 그 친구의 분노에 맞춰서 견뎌내야 했다. 그리고 퇴근 시간마저 함께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체력적으로 엄청나게 고단한 하루하루였다. 내 시간과 체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브런치를 쓰겠다는 생각도 못하고 항상 집에 오면 씻지도 않고 잠만 자는 것이 내 생활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버터기가 힘들었다. 그 친구를 이해시켜야 했다. 나는 그 친구와 함께하는 순간이 체력적으로 부담이 된다는 것을 이해시켜야 내 시간을 그 친구로부터 배려받을 수 있기에 내 성향을 이해시키려고 했다.


그 시도는 너무 처참했다. 그 친구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분노를 표출했고 계속 나는 나를 설명해 가며 그 친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살해협박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 친구를 손절했다.


그 손절 덕분에 나는 자연스럽게 내 시간이 생겼다. 지금도 피곤하지만 누워있는 동안 그동안 못했던 브런치가 생각났다. 그래서 다시 작성하게 되었다. 확실히 나는 내 시간을 벌어야 하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무언가를 행동시키기 위해서는 꼭 내 시간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소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수없이 발생할 것이다. 그럴 때는 서로가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사이가 지속된다고 생각된다. 전혀 다른 색상을 가진 사람이어도 이해라는 부분에서 서로가 노력한다면 사이는 지속된다. 그게 존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간들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맞춰가야 할 부분을 조율하는 세상을 원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이제 맞춰주기 싫고 손절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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