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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랑 Apr 12. 2024

스치는 인연에도 정성을.

내가 받은 최고의 서비스 Madrid,Spain

사범대학 4학년이 되던 해 4월, 한 중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갔다. 혈기왕성한 중학교 2학년 남자반을 담당했던 나는 '약육강식'이 무엇인지 확실히 배웠다. 모난 교실안에서 삼삼오오 무리진 학생들 안에 강자와 약자의 미묘한 경계가 지어진 게 내 눈엔 너무 잘 보였다. 그런 내 시선이 머문 곳은 '약한 아이들' 쪽이었다. 그들의 연약한 모습에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텅빈 교실에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고 같이 교생으로 근무하던 동기를 붙잡고 꺼이꺼이 울기도 했다. 사람에게 쏟아붓는 에너지가 많았던 나에게 교사란 직업은 딱일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정이 많은 내가 교사가 되면 남들보다 더 잘 할 줄 알았던건 허무맹랑한 나의 꿈이었다. 어찌보면 더 냉철하고 더 강인한 사람이 교사란 직업을 갖고 살아가기에 적합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치면 나는 교사가 되어 살아가기엔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지나치게 많이 써서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도 못하고 나 자신을 그저 피곤하게만 만들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교생실습이 끝나고 나는 교사가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못하는거면서 안하는거라 선포하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시작된 내 직업탐색은 '외항사 승무원'이란 미지의 세계에 문을 두드렸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저 잘해주기만 하면 되는 직업이니 사람 좋아하는 내겐 딱인 듯 했다! 때론 쓴소리도 해야하고 인간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며 골치 아픈 일을 겪으며 살기보단 훨씬 단순하고 가벼워보였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속에서 호의만을 베풀면 되는 삶. 훨씬 나에게 잘 맞아보였다.


그렇게 시작된 '서비스인'의 삶은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손님들에게 잘하기만 하면 되지!'하는 생각은 얼마나 천진한 생각이었는지. 인간에 대한 이해는 세상 다 하는 척 했지만 넓은 세상에 각양각색 다양한 사람이 살고 있는 '다름'을 직면할 때마다 당혹함을 피할 길이 없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라고 했던가. 승객에게 그저 친절하게 대한다는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 또한 감정의 동물이었기에 고된 스케쥴에 지쳐가는 체력을 끌어올려 진정성있는 친절한 서비스를 하기 버거운 날도 있었고,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않는 뾰족한 승객을 만나면 마음을 다치기도 했다. 아무리 내가 친절함을 기본으로 장착한 서비스인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내 호의를 당연한듯 여기며 더 많은 요구를 하는 손님을 만나면 지치기도 했다.


늘 좋은 서비스를 실천하기가 힘들다고 느껴질 때쯤 스페인 마드리드로 비행을 가게 되었다. 스페인에는 '하몽'이라는 돼지고기 뒷다리를 천장에 오랜 시간 매달아 숙성시킨 햄이 있다. 정육점에 가면 주렁주렁 돼지고기 뒷다리를 매달아놓고 판매하는데 그날따라 그 햄이 먹고 싶어 숙소 근처 대형마트에 갔다.


생각보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꽤 많은 스페인. 마트 정육점에서 근무하고 있던 40대쯤으로 보이던 여자 점원은 내가 영어로 주문하자 아는 영어를 총 동원, 바디 랭귀지를 하며 나를 응대했다. 정갈한 유니폼에 깔끔한 인상의 그녀는 완벽히 알아듣지도 정확히 대답하지도 못했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그 모습에 이미 좋은 서비스를 받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 분의 움직임을 보고 깊은 감동이 심금을 울렸다. 내가 주문한 햄을 짚어 도마에 올리고 그걸 썰어 포장지에 싸는 한 동작, 한 동작이 진중하고 정성스러웠다. 누군가는 대충 대충 가볍게 할 법한 일임에도 마음을 쏟아 성의있게 하는 모습에 말이 통하지 않았어도 내게 닿아 감동으로 남았다. 고맙다고 인사하는 내게 덩달아 고맙다고 말하며 미소를 보인 그녀를 보며 이게 바로 좋은 서비스구나, 무릎을 탁 쳤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를 느낄 수 있다. 오감으로 상대의 진심을 알 수 있다. 내가 억지로 억지로 짜내는 자본주의 미소보다 묵묵히 성심성의껏 움직이는 온 몸에서 나의 진심이 묻어나올 수 있음을. 어떻게 기나긴 미사여구없이 나의 진심을 상대에게 전할 수 있는지 배운 순간이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하루에도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수백명씩 스쳐 지나가는 직업을 가진 나는 얼마나 많은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가. 그렇게 스쳐가는 모든 인연이 좋은 인연이길 바란다. 손님들이 나로 인해 잠시라도 편안하길, 잠깐이라도 웃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일터에 나간다. 따스한 말 한마디, 고개를 숙이고 경청하며 표하는 존중, 손짓과 몸짓 하나하나에 담은 배려가 느껴졌던 마드리드의 그 점원을 기억하며, 묵묵히 내가 해야할 일에 나의 온 마음을 담고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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