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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랑 Oct 21. 2023

신이 있다면 제 손을 잡아주시길.

그토록 간절했던 순간 Montreal, Canada

3월의 캐나다. 카타르 도하에서 10시간이 넘게 날아가 도착한 그 곳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시기에 제법 따뜻했던 도하와 달리 몬트리올은 오돌오돌 어금니 부딪히게 떨릴만큼 추웠다. 더운 나라에서 온 크루들은 함박눈을 맞으며 종종 걸음으로 호텔버스에 올랐다.


한국을 떠나온지도 어언 1년. 입사 1년차의 나는 어느 정도 일에 적응한 상태였다. 처음의 두근거림은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세계 여러 나라에 발도장을 찍는 기쁨이 채 가시지않은 상태였다. 새내기 승무원의 티를 조금씩 벗어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뽀송뽀송한 어린 승무원이었다.


처음 가 본 캐나다. 흰 눈이 발목까지 쌓인 그 곳은 지금도 아주 춥게 기억된다. 어둑했던 호텔방. 도착한 날 밤부터 카카오톡 메세지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한국에서 걸려온 엄마의 보이스톡. 한국을 떠난지 겨우 1년 밖에 안됐지만 한국에서의 일상은 잊혀지고 있던 찰나였다. 새벽녘 울리는 엄마의 연락에 다시금 나의 현실을 상기시켰던 순간이었다. 차가운 눈덩이가 정면으로 날아와 내 머리를 후려치는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기숙사생활을 했고 대학생 때도 기숙사생활이나 자취를 하며 집에서 나와 살곤 했었다. 그럴 때 가끔씩 보는 엄마와 목욕탕에서 몇 시간씩 수다 삼매경에 빠지면 옆에서 보던 아줌마들이 딸이 있어 부럽다고 한마디씩 덧붙이곤 했다. 이런저런 속 시끄러운 일이 있을때면 엄마와 대학 캠퍼스 산책을 하며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그런 나의 존재는 엄마에게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달려가는 세상 유일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16시간을 날아 도착해야하는 곳에서 엄마의 연락을 받은 그 날, 호텔 창 사이로 매섭게 새어 들어오던 차가운 밤공기가 온 몸을 스산히 감쌌다.


힘든 상황의 엄마에게 한달음에 달려갈 수 없던 나. 일반전화도 안되서 뚝뚝 끊기는 보이스톡에 의지하며 엄마의 안부를 묻던 나는 그저 가슴만 졸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떨어져 산 적은 있어도 엄마에게 닿는 물리적 거리가 이토록 먼 적은 없었기에 처음으로 그 무서운 거리 앞에 무기력하게 주저앉았다. 그리고 하염없이 울었다.


한참을 울다 동 트는 새벽을 맞았다. 창 밖으로 성당이 보였다. 호텔 바로 옆에 조용히 서 있는 성당. 그 곳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천주교 신자도 아닌데 새벽 미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성당 안은 여자 신부님, 캐나다 할머니 한 분,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전부였다. 신부님의 짧은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성당에 울려퍼졌다. 앞에 계신 백발의 할머니가 앉았다 일어났다 하실 때 마다 나도 따라서 앉고 서고 했다. 두손을 가슴앞에 가지런히 모은 채. 마음으론 온통 한가지만 빌었다. "우리 엄마를 살려주세요. 엄마를 도와주세요. 엄마를 볼 수 있게 해주세요."

엄마의 안위만이 그 순간 내가 바라는 유일한 소원이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캐나다에서의 체류시간은 흘러갔다. 다시 베이스로 돌아가며 바로 한국이 아닌 카타르로 돌아가야한다는 것 또한 가슴 시리게 아팠다. 얼른 엄마를 보고싶을 뿐이었기에 내가 일하는 곳이 어느 외딴 중동나라라는 것 또한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돌아가는 비행기안에서도 엄마가 잘 있기를 그저 바랐다. 11시간 비행 후 바로 짐을 챙겨 8시간을 날아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엄마를 보았다.


내 눈 앞에 엄마가 살아 숨쉬고 계신것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늘 그랬듯 한번의 폭풍우가 지나간 후 잔잔해져 있는 상태였고 나는 엄마라는 존재를 다시 볼 수 있음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서로 곁에 있지 못해도 잘 지내주길, 매일이 잔잔한 일상이길 바라며 다시 카타르행 비행기에 올랐다. 엄마 얼굴만 보고 8시간이 넘는 여정에 몸을 싣고서 다시 가슴앞에 두 손을 모았다. '우리 엄마 지켜주세요.'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기도밖에 하지 못하는 딸이다. 말은 엄마 생각 한다면서도 정작 효도 한 번 제대로 못한 못난 딸. 어릴 때부터 바쁜 엄마를 보며 내 할일 내가 알아서 잘하는게 엄마를 돕는거라 생각하며 묵묵히 내 앞길만 보고 달려왔는데 그것보다 한발짝 나아가 엄마를 위해서 무언가 더 했어야한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그 때나 지금이나 간절히 기도한다. 신이 내 손을 잡아주시길, 내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엄마를 지켜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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