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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개굴 Sep 16. 2023

노비의 광화문 출퇴근길

유유자적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지 삼 개월 만에 출근이란 걸 다시 하게 되었다. 돈은 서울살이의 출입증이었다. 가난한 예술가를 표방하기엔 나는 너무나 욕망이 그득그득한 인간이었다. 사고 싶은 건 사야 하고 먹고 싶은 건 먹어야 하고 가고 싶은 곳은 가야 직성이 풀리는 고약한 성격을 뒷받침하려면 돈은 필수였다. 고흐는 새 캔버스를 살 돈이 없어 자신의 그림 위에 다른 그림을 덧그렸다는데 내가 화가였다면 일단 두꺼운 캔버스와 부드러운 붓과 선명한 물감 따위를 사기 위해 그림은 안 그리고 노동을 했을 것이다. 등산화와 배낭을 장만해야 산에 오를 수 있는 사람, 바닷가에 들어가기 전에 마음에 드는 수영복을 사야만 하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가끔은 진지하게 사치스러운 보바리 부인이 환생한 게 아닐까 자의식 가득한 의심을 하기도 한다. 새 드레스를 입고 파리에 간 보바리 부인처럼 새 사원증을 걸고 광화문으로 첫 출근을 했다.

다시 제 발로 회사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돈도 돈이었지만 회사가 위치한 곳이 '광화문'이라는 이유도 컸다. 9시 뉴스 시작 전엔 꼭 광화문이 등장한다. 모든 소식이 모이는 곳, 서울의 중심이자 우리나라의 중심을 담당하는 곳이 광화문이라는 것에 의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뿐만인가. 기업 로고를 수염처럼 달고 광화문을 지키는 웅장하고 거대한 사천왕 같은 빌딩들, 사시사철 기세를 내뿜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 시청 광장, 플라자 호텔, 드넓은 도로, 그곳을 잔뜩 메운 사람들, 직장인들의 성지. 명실상부 서울의 마스코트인 광화문에서 일하게 되다니! (이 글을 쓸 때 많이 흥분한 상태였다는 걸 너그럽게 감안해 주시길.)

노비를 하더라도 이왕이면 대감집 노비를 하라고 했다. 비록 노비의 노비로 들어갔을지언정 부모님은 무척 기뻐하셨다. 아마 내가 태어난 이래 가장 크게 효도한 일이 아닐까 싶다. 아빠는 난생처음으로 '아가'라는 호칭으로 나를 불러 경악케 했고 엄마는 친척과 친구들한테 자랑을 할 때마다 내가 들어간 회사의 이름 앞에 꼭 "광화문에 있는 ㅇㅇㅇㅇ"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만큼 장소만 대도 위용을 과시할 수 있는 곳이었다. 천덕꾸러기 철부지 큰딸은 자랑스러운 큰딸로 갑작스럽게 지위가 변했다. 큰이모는 첫 출근하는 나의 모습을 사진까지 찍어 엄마아빠한테 보내주었다. 모두의 기대를 받아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걱정과 설렘으로 복잡해진 심정으로 회사로 향했다.

출근 전 커뮤니티의 직장인 게시판에 '광화문'을 검색했다. 맛집 정보, 회식장소 추천, 반차 내고 들른 교보문고, 비싼 밥값, 끔찍한 지옥철 등 직장인들의 기쁨과 애환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앞으로 알아둬야 할 정보들을 기억하려고 하나하나 살펴보는데 익숙한 댓글이 보였다. 이년 전 누군가가 청계천 사진과 함께 퇴근한다는 게시물을 올렸는데 그 게시물에 내가 부럽다며 댓글을 남겼던 것이다! 아예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서울살이를 막 꿈꾸고 있을 때였고 막연하고 희망 없는 읊조림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년 후 이곳에서 일하게 되다니. 역시 인생은 얼레벌레 흐른다. 인생의 알 수 없음과 단계 없음을 실감했다.

그리고 오늘, 게시물의 글쓴이와 똑같은 장소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한 손에는 서류봉투를 들고 목에는 사원증을 걸고. 꺼지지 않는 건물의 불빛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각자의 길을 바삐 가는 사람들을 피하기도 하면서 벅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귀에는 드라마 궁 OST 중 동명의 '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광화문을 산책하기에 이보다 딱 맞는 선곡은 없었다. 한곡 반복을 설정해 몇 번을 들었는지도 모를 무렵 경복궁이 눈앞에 등장했을 땐 가슴이 울렁거렸다. (뽕에 차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양해를.) 2월이었지만 광화문 광장은 벌써 다가오는 봄 준비에 한창이었다. 날이 풀리면 블루보틀 커피를 테이크 아웃하고 초록색 카디건을 입고 광장을 산책하리라. 그날을 상상하니 살포시 웃음이 나왔다. (이 가련한 인간은 얼마 안 가 웃음기를 잃게 되는데...)

설렘이 가시지 않아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씨에 추운지도 모르고 계속 걸었다. 시청 앞을 지나는데 일본인 관광객들이 서투른 한국말로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재빨리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고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어설프게 떨어져 있던 젊은 남자 세 명은 "하나, 둘, 셋" 구호를 따라 하며 멋쩍게 웃었다. 가까이 모이라는 내 손짓에 남자들이 어기적거리며 간격을 좁혔다. 'Seoul' 입간판이 한 글자도 빠짐없이 잘 보이도록 심혈을 기울여 찍었다. "감사하므니다." 사진을 받아 든 남자가 덧니를 드러내며 인사했다. 외국인과 나는 지금 같은 마음일 것이다. 서울에서 이방인으로 남는 게 싫어 직장을 구했지만 어쩐지 서울이 타지로 느껴지는 지금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었다.

하루 종일 긴장해서 움츠려있던 몸을 지하철에 싣자마자 녹아내렸다. 불길한 느낌에 눈을 뜨니 환승역을 이미 놓친 뒤였다. '아차산'역에 '아차'하며 내렸다. 흐물거리는 몸을 반대 방향 지하철에 다시 구겨 넣었다. 진정한 K-직장인이 된 기분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이 출퇴근길을 반복하게 될까. 그나마 긴 회사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건 리셋 능력 때문이었다. 아무리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어도 회사를 나서는 순간 잊어버리려 노력했다. 매번 성공하진 않았다. 그러나 실패한 다음 날 영혼이 1cm 줄어든 느낌이 못 견디게 싫었다. 물론 회사에 있을 땐 일에 충실했다. 돈을 받는 만큼 진심을 다했고 책임도 졌다. 퇴근 후에 내키지 않는 회식자리에 끌려갈 때도 많았다. 그만큼의 감정노동도 월급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버틸 수 있었다. 다만 내 안에 회사 일이 비집고 들어오는 건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바퀴벌레가 들어오지 못하게 약을 뿌리듯 마음의 현관문에 울타리를 쳤다. 해충이 내 인생을 좀먹지 못하게 막았다. 먹이를 구하러 남의 집을 탐하는 바퀴벌레와 싸웠다. 벌레들이 배를 뒤집고 버둥거리면 더 독하게 약을 뿌렸다. 벌레들만 몸부림치는 게 아니었다. 나도 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고통은 회사에서 겪는다. 안으로 데리고 오지 않는다. 나만의 신조였다. 집에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싣고 지하철 문이 탁하고 닫힐 때 내 하루는 새롭게 열렸다. 회사 이름이 박힌 다이어리를 매만지며 다짐했다. 살기 위해 몇 개월만 눈 딱 감고 죽어보자. 그럼 더 오래오래 살아남을 테니.  

나는 지금 새로운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갈 것이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갈 때까지 나의 걸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분명 광화문이 그저 지긋지긋한 출퇴근길로 보이는 날도 찾아올 것이다. 밥 벌어먹고 사는 노곤함과 서글픔을 잊은 건 아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정작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느끼는 공허함은 다신 겪고 싶지 않다. 그러니 아무리 회사 안에 갇혀있어도 내 마음만은 청계천의 강물처럼 흐르게 놔둬야지. 얼레벌레 흐르되 절대 고여있지는 말 것. 그렇게 흐르고 흐르다 보면 바다를 만날지도 모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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