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평생 단 한 가지 음식만 먹으라고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두부를 선택할 것이다. 하얗고 정갈한 자태. 존재에 대한 미련 없이 기꺼이 사라지는 물컹한 식감. 성격 더러운 맵고 성난 음식들과도 융화되는 포용력. 외유내강의 표본이다. 두부가 사람이라면 소박하지만 단단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서민들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싼 가격에 생명을 죽이지 않고도 단백질을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착하고 장한 음식인가. 청국장, 마파두부, 강된장 등 두부가 들어간 모든 요리를 사랑하지만 그중에서도 '두부두루치기'는 칼국수와 더불어 나의 소울푸드이다. (이건 도저히 한 가지만 택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서울 사람이라고 주장했지만 입맛만 보면 영락없는 대전 사람이다.
두부두루치기가 대전의 토종 음식이라는 걸 아는가? 타 지역에서는 두부두루치기를 파는 걸 잘 본 적이 없다. 있다 하더라도 평범한 '조림'에 가깝다. 어떤 친구가 두부조림과 두부두루치기의 차이점이 대체 뭐냐고 물었었다. 답답하지만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다르다니까? 뭐가 다른데? 아무튼 달라! 이건 먹어봐야 안다. 조림은 두부가 양념에 가려져 있지만 두루치기는 두부가 양념에 지지 않는다. 빨간 옷을 입은 두부는 꾸민 듯 안 꾸민 듯 접시 위에서 포즈를 취한다. 조림은 매콤하면 매콤한 거고 달큼하면 달큼한 거다. 맛이 이차원적이다. 그런데 두루치기는 묽은듯하면서 칼칼하고 심심한듯하면서 자꾸 당기는 모순적인 음식이다. 묘하다. 두부두루치기를 먹은 타 지역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비슷했다. "먹을 땐 그냥 그랬는데 이상하게 자꾸 생각나." 두부두루치기는 조용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모두에게 인기 좋은 '의문의 인싸'이다.
칼국수는 말해 무엇하랴. 대전은 칼국수 축제가 열리는 도시다. 이걸로 설명이 되려나. 칼국수 집이 다 기본은 한다. 그러니 대전에서 유명한 칼국수 집의 칼국수 맛은 어떠랴. 친구 샘이의 부모님은 칼국수 장사를 하신다. 대전에서 손꼽히는 맛집이다. 소울메이트 덕분에 소울푸드를 더 맘껏 먹을 수 있었다. 우스갯소리지만 칼국수 때문이라도 샘이와 평생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 손으로 직접 치댄 반죽을 숭덩숭덩 썰어내 울퉁불퉁한 면은 입으로 들어가는 순간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이른 새벽부터 끓여낸 사골육수는 밀도가 높고 눅진하다. 애호박과 감자는 육수의 깊은 맛을 해치지 않으면서 감칠맛과 포만감을 더해준다. (여기까지 쓰니 너무 배고프다.) 서울에 온 뒤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칼국수 집'이라는 간판을 내건 식당에서 칼국수를 먹은 적이 있는데 실망을 금치 못했다. 대전에서 먹었던 칼국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형편없는 맛이었다. 칼국수 부심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 뒤로 서울에서는 칼국수를 돈 주고 사 먹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
소울푸드는 말 그대로 영혼의 음식이란 뜻이다. 배가 허기질 때가 아니라 영혼이 허기질 때 찾게 되는 음식이 소울푸드이다. 그런 음식들은 일상 속에 묻혀 있다가 불현듯 나타난다. 그럴 땐 영혼이 먹고 싶어 하는 거니 참지 말고 먹어줘야 한다. 그런데 서울에 와서는 도통 소울푸드를 먹기가 힘들었다. 두부두루치기는 샘이네 가게에서 얻은 양념장으로 큰이모가 자주 만들어줬다. (샘이네 가게는 두부두루치기도 끝내주게 맛있다.) 맛있게 먹었는데 완벽하게 채워지진 않았다. 양념장은 가게에서 쓰는 것과 똑같은 것이고 이모의 요리 솜씨는 아주 훌륭하다.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서울에서의 소울푸드가 없었다. 새로운 영혼이, 새로운 음식이 필요했다.
서울에 오고 난 후 한 달이 좀 넘었을 무렵 엄마와 아빠가 찾아왔다. 앞장서서 이모와 부모님을 모시고 서울구경을 시켜줘야 하는 입장이었다. (사실 어른들이 나보다 훨씬 오래 서울에 살았다.) 점심메뉴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모가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이 있다고 했다. 감자옹심이였다. 엄마는 춘천이 고향인데 누가 강원도 사람 아니랄까 봐 감자를 무척 좋아한다. 나도 감자는 엄청 좋아하는데 엄마가 감자옹심이를 그토록 좋아했는지 처음 알았다. 감자옹심이를 제대로 먹어본 기억이 없는데, 그건 엄마도 잘 먹지 못했다는 뜻일 거다. 미안했다. 멀리서 오니까 더 좋은 음식을 먹이고 싶었는데 엄마는 감자옹심이를 고집했다. 저번에 서울에 사는 친구를 보러 왔다가 서촌에서 먹은 적이 있는데 강원도에서 먹던 맛을 똑같이 재현한 가게가 있다고 했다. 얼떨결에 엄마의 주도로 식당을 찾았다. 밥을 먹기 전에 청와대 관광을 하느라 바깥에서 몇 시간 떨다 실내에 들어오니 몸이 노곤노곤해졌다. 다소 무뚝뚝한 사장님은 감자옹심이만 들은 '옹심이만'은 떨어졌다고 일러주었다. 우리는 옹심이와 메밀칼국수를 섞은 옹심이메밀칼국수만 먹어도 상관없었는데 엄마는 난색을 표했다. 생전 식당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 엄마가 애걸했다. "사장님, 충남 금산에서 왔는데 옹심이만 한 그릇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사장님은 감자를 가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바로 해줄 수가 없다고 했지만 엄마의 간곡한 부탁에 이내 져주었다. 엄마는 장난감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신나 보였다. 사장님의 우려와는 다르게 제법 빨리 음식이 나왔다. 정식으로 맛보는 감자옹심이는 취향을 저격한 맛이었다. 수프에 가까운 걸쭉한 국물을 한 입 떠먹은 후에는 숟가락을 멈출 수 없었다. 국물 안에 숨은 옹심이는 보들보들하고 쫄깃했다. 두부와 수제비가 결혼해서 낳은 자식 같았다. 식감은 비슷한데 목으로 더 쉽게 꿀떡꿀떡 넘어갔다. 같이 들은 메밀칼국수도 구수하고 푸짐했다. 탱탱한 면발이 아니라 뚝뚝 끊기는 맛이 정감이 갔다. 엄마를 비롯해 모두가 그릇 바닥이 보일 정도로 개운하게 비웠다.
그 후로 종종 감자옹심이가 떠올랐다. 대전에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는데 서울엔 감자옹심이를 파는 곳이 은근히 많았다. 강원도랑 가까워서 그런 걸까. 얼마 남지 않은 백수의 시간이 아까워 옆동네인 쌍문동을 둘러보고 오는 길에 감자옹심이를 파는 가게를 발견했다.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 있는 가게였는데 간판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하차벨을 눌렀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는데도 식당 안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주인은 손님이 반가워 보였다. 과분한 환대를 받고 자리에 앉았다. 세련되지 않은 내부를 보니 마음이 탁 풀렸다. 배고프다고 느낄 새도 없이 걸어 다니느라 허기를 알아채지 못했다가 메뉴판을 펼치는데 꼬르륵 소리가 났다. 저번처럼 감자옹심이칼국수를 먹으려다 엄마처럼 '옹심이만'을 주문했다. 뒤이어 옹심이가 세숫대야만 한 그릇에 가득 담겨 나왔다. 우연히 찾아온 손님을 놓치지 않으려는 전략인지 원체 인심이 푸짐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나야 땡큐였다. 다 먹을 수 있을까 걱정도 잠시. 어느새 마지막 옹심이를 아쉬워하며 삼키는 나를 발견했다. 국물까지 다 마시자 직감이 왔다. 너, 나의 새로운 소울푸드가 돼라.
소울푸드는 이렇듯 거창하지 않게 정해진다. 어째서 돈육함량이 높은 진짜 소시지보다 어육함량이 높은 가짜 분홍 소시지의 맛이 더 그리울까. 언제나 치댈 수 있는 만만함, 기댈 수 있는 편안함만이 소울푸드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이다. 5성급 호텔의 조식이 소울푸드란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매일같이 먹을 수 있는 재벌이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술에 취해 알딸딸한 상태로 들른 편의점에서 먹는 인스턴트 햄버거라든가 바쁜 아침 엄마가 대충 뚝딱 만들어준 간장계란밥만이 소울푸드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사람들은 맛이 아니라 쉼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소울푸드는 인생의 틈이 돼준다. 여봐, 아무리 바빠도 한 그릇 정도는 괜찮잖아? 말을 거는 듯하다. 각박한 세상을 살다 영혼이 잠시 쉴 곳을 찾아 헤맬 때 한 그릇 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 당장 먹으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