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상투적이고 흔한 단어지만 나와는 친하지 않은 단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까지는.
나는 혼자 있는 게 세상에서 제일 편하거니와 제일 재밌다. 스스로가 나 자신과 가장 가까운 타인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렇다. 혼자 밥 먹는 게 어려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즐긴다.) 혼자 여행도 종종 다닌다. 혈혈단신으로 뉴욕에 간 적도 있다. 어렴풋하게 알고 있던 단어인 '혈혈단신'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의지할 곳이 없는 외로운 홀몸'이란 뜻이란다. 외롭다는 뜻의 '혈(孑)'이 쓰였다는데 그럼 취소하겠다. '단신'으로 뉴욕에 간 적이 있다. 아무리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고 해도 14시간에 걸쳐 지구 반대편에 홀로 간다는 건 나에게도 도전이었다. 걱정과 달리 꽤 괜찮았다. 더럽고 무섭기로 소문난 뉴욕의 지하철도 거뜬하게 타고 다녔다.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근처의 스타벅스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던 시간은 커피 향만큼 그윽하고 깊었다. 그런데 같은 한국인들로 둘러싸여 있고 말 다 통하는 대한민국 서울의 하늘 아래서 이렇게 외로워하다니.
외로움을 예상 못한 건 아니었다. 서울에 오기 전 샘의 부재를 견딜 수 있을까 많이 걱정했다. 샘은 걱정하는 나에게 어쩌면 우리의 우정은 우리보다 힘이 셀 지도 모른다고 했다. 샘의 말이 맞았다. 우리의 우정은 우리보다 힘이 셌다. 두 시간이라는 물리적 거리는 손쉽게 넘어설 만큼. 샘이와 떨어진 게 문제가 아니었다. 몇 달째 원인을 모르는 외로움에 시달렸다. 사실 외로움은 상태를 간편하게 설명하는 용어일 뿐 해명되지 못한 울렁임이 계속되고 있었다. 가슴 안에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구멍이 뚫려 영혼이 줄줄 새고 있는 것 같았다. 서울에 오기 전만 해도 불타던 의지와 열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재로 변했다. 이렇게 된 이유로 단순히 '회사'를 꼽기에도 속 시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회사에 그렇게 많은 비중을 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마음이 쉬지 않고 뒤척이던 어느 날 흥미로운 제안이 날아왔다.
"내 친구 소개받지 않을래?"
남자지인이 보낸 문자에 아주 오랜만에 눈이 빛났다. 뭐? 영혼이 새고 있다고? 웃기는 소리 하네. 줄줄 새고 있는 건 연애세포다, 이 자식아!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무의식이 내숭 그만 떨고 본심을 밝히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사실은 무척 단순한 문제일 수도 있었다. 왠지 자존심이 상해 외면했지만 나에겐 그저 심청이의 깨진 항아리를 막아준 두꺼비가 필요한 걸지도 몰랐다. 두꺼비처럼 복스럽고 튼실한(?) 인연이 찾아온다면?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파지만 까짓 거 만나보기로 했다. 어떻게 만나든 감정만 자연스러우면 된 거 아닌가. 어느새 소개팅에 입고 갈 옷을 고민하고 있는 나였다.
지인과 지인의 친구와 함께한 술자리는 유쾌했다. 서로에 대한 은근한 탐색이 오갔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똥구멍에 얼굴부터 들이대고 보는 개들과는 다르다 치부하지만 실상 개들과 다를 것도 없다. 소개팅은 예의라는 겉옷을 입고 들어가는 혼탕이다. 뿌연 수증기 속 상대의 중요한 부분을 보기 위해 눈알을 굴린다. 오래간만에 벌이는 탐색전은 짜릿했고 탐색전이 벌어지는 배경도 훌륭했다. 1차로 유명하다는 충무로의 노포에서 회를 먹었고 2차로는 근사한 바로 옮겨 비싸고 캐주얼한 안주를 먹었다. 3차로는 연예인들이 들락거린다는 을지로의 가맥집에 갔다. 마지막으로 노래방에서 도원경의 '다시 사랑한다면'을 부를 땐 이미 얼큰하게 취한 뒤였다. 호감이 묻은 작별인사를 주고받고 잠에 들었다. 그러나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발견한 건 숙취와 함께 찾아 온 더 커진 마음의 구멍이었다.
광욱과 헤어진 초희는 다급하게 누구하고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온종일 사람 구경이라곤 못 해본 것처럼 사람이 그리웠다.
박완서 <휘청거리는 오후>
소설 속 초희는 광욱을 만났는데도 사람이 고파 종종거린다. 초희는 광욱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의 돈을 보고 결혼하려고 한다. 광욱과 헤어진 초희는 공중전화 앞에서 순수했던 시절에 만난 남자를 떠올린다. 소개받은 남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도 아니고 절절하게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는지. 서울의 인구는 약 940만 명이다. 대전보다 9배 정도 많다. 어딜 가나 사람에 치인다. 900만 명을 만나든 1000명을 만나든 100명을 만나든 단 한 명이 없다면 허기는 채워지지 않는다. 온종일 원하는 장소에서 멋진 사람들과 대화했는데 사람이 그리웠다.
속이 쓰려 해장을 하려고 배달의 민족 앱을 켰다. 순댓국, 우동, 알탕, 햄버거 등 없는 메뉴가 없다. 서울은 B마트가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에 밤 열한 시에도 버튼만 누르면 토마토가 문 앞에 와있다. (술 먹으면 토마토를 찾곤 한다) 느끼한 음식으로 위에 기름칠을 할지 뜨끈한 국물로 장을 풀어줄지 고민하다 이내 물만 들이켜고 만다. 사람도 음식도 너무 많으니 도저히 못 고르겠다. 모든 게 다 있어서 아무것도 없는 곳, 서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