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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개굴 Sep 21. 2023

저도 은평구 살아요!

퇴근이 일렀던 어느 날이었다. 그냥 집에 들어가긴 아쉽고 심심해서 하릴없이 걸었다. 저 멀리 동아일보 사옥 앞에 사람들이 모여있길래 가까이 다가갔다. 동아일보 사옥 일층은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생방송을 직관할 수 있다. 얼마 전엔 요새 가장 인기 있는 개그맨인 '다나카'도 보았다.

공개 방송이 진행되는 스튜디오 유리창은 까만 뒤통수들이 뒤덮고 있어 안을 볼 수 없었다. 여기저기서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도대체 누구야? 어떤 유명인사길래 저렇게 호들갑이지? 조급해진 나머지 인파 안을 비집고 들어가 까치발을 세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지상에서 5센티 정도 떨어졌을 때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이상형 목록에 최초의 여성으로 자리매김한 댄서 '아이키'였다.

"이번에 은평구 홍보대사가 되셨다면서요?"

"네. 제가 은평구에 오래 살았거든요. 정말 살기 좋은 곳이에요."

아이키 언니는 못 들었겠지만 나는 힘차게 외쳤다.

"언니!!! 저도 은평구 살아요!!!"

물론, 마음속으로.


은평구에 이사 온 지 약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저 멀리 북한산이 보이는 사람냄새나는 곳이다. 개발이 늦게 된 터라 번쩍번쩍한 빌딩은 거의 없고 옹기종기 골목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집을 보러 다닐 시간이 없어 하루 만에 결정한 동네치곤 괜찮다. 이곳 역촌동에 처음 왔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노인, 중년, 젊은이, 아이 등 모든 세대가 고루 보인다는 것이었다. 말티즈, 푸들, 진도, 믹스견, 불독, 리트리버 등 심지어 강아지 종까지 가지각색이다.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구구콘을 찾는 아저씨를 만나기도 하고 집 앞에서 내 또래 커플이 싸우는 걸 보기도 하는 곳이다. 집 근처 호프집에는 등산복을 입은 중년 무리와 추리닝을 입은 젊은이 무리가 5호선 열차 칸 승객들처럼 모여있다. 나도 그 틈에 슬쩍 끼어 시원한 생맥주를 들이켜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집으로 향한다.


이사를 오기 전 은평구 주민들이 모여있는 커뮤니티에서 맛집이란 맛집은 미리 섭렵했다. 옷수선 잘하는 곳, 1000원짜리 지폐도 받아주는 ATM 기계가 있는 곳, 걸러야 하는 불친절한 미용실 등 생활에 꼭 필요한 잡다한 정보도 많이 얻었다.

동네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어야 동네와 빨리 친해질 텐데 평일엔 점심과 저녁을 모두 구내식당에서 해결하는 편이라 그럴 기회가 별로 없었다. 주말에라도 나가서 먹으려고 했는데 꼼짝도 하기 싫었다. 맛집 리스트를 뒤적거리다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마라샹궈를 배달시켜 먹어보았다. 배달의 민족 '우리집' 주소를 '서울특별시 역촌동 ㅇㅇ-ㅇㅇㅇ'로 바꾸니 은평구 주민이 되었다는 게 체감이 되었다. 곧이어 배달이 왔다. 역시 입소문만큼 믿음직한 정보도 없다. 소문대로 맛있었다.

1인 가구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절친이 있다면 '빨래방'일 것이다. 이사 첫날 이불 빨래를 하고 한 달이 됐으니 비로소 그날이 왔다. 미뤄놓은 숙제를 해야 했다. 포털사이트에 '내 근처 빨래방'이라고 치니 엄청 많은 빨래방들이 나왔다. 5분 거리에만 세 곳이 있었다. 어차피 이불을 둘러메고 멀리까지 갈 순 없으니 세 곳에서 선택해야 했다. 자취 경험이 꽤 쌓인 터라 이곳저곳의 빨래방을 이용해 봤는데, 내 기준은 확실하다. 읽을거리가 많이 구비되어 있는 곳이다. 아예 없는 곳을 가면 빨래가 다 되는 시간까지 핸드폰만 하다가 시간을 죽이는 경우가 많아 책을 들고 가야 하는데 그게 은근히 번거롭기 때문이다. 일단 제일 가까운 곳으로 향했다. 시설도 쾌적하고 휴게공간도 널찍했다. 그리고 읽을거리가 있었다. 이곳으로 결정! '서울사랑'이라는 잡지를 읽다가 내용도 알차고 재밌어서 1년 무료구독을 신청했다.

빨래를 마친 후 집에 돌아와 섬유유연제 향기를 맡으며 한숨 잤다. 이사를 하고 나서도 주말엔 본가에 가거나 대전에 가서 집에 종일 있을 겨를이 없었는데 이렇게 하루를 보내니 집이랑 친해진 기분이 들었다.


산다고 다 우리집, 우리 동네가 되는 건 아니다. 몇 년을 살아도 물리적으로 살뿐 정서적 교감을 나누지 못한다면 아무 추억도 없는 텅 빈 공간이나 마찬가지다. 동네에 정을 붙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 바로 어슬렁거리며 동네 산책하기. 볼일이 있어서도 안된다. 다음 일정이 있어서도 안된다. 바쁜 건 두 눈과 두 발이면 된다. 단골이 될만할 해장국집을 찾아 두리번거리거나 신호등의 파란불이 켜졌을 때 냅다 건너버리면 그뿐이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보물 같은 곳이 있다. 동전 노래방과 그릭요거트를 파는 GS편의점이다.

스타벅스와 역세권을 합친 '스세권'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동노권'이 무척 중요한 사람이다. 혼자 노래를 부르는 걸 좋아해서 삘이 왔을 때 노래를 부르지 못하면 노폐물이 쌓이듯 흥이 쌓인다. 여럿이서 왁자지껄 노는 것보다 혼자 열창하는 걸 좋아한다. 그런 나에겐 코 앞에 동전 노래방이 있는 곳에 산다는 건 아주 만족스러운 입지조건이 아닐 수 없다. 후기를 보니 매우 친절하고 서비스를 아낌없이 준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3000원을 넣고 목이 쉬어서 돌아왔다고 했다. 아직 가보진 못했다. 이쯤 노래를 쉬었으면 내 안의 노래방 신호가 켜질 때가 됐으니 곧 가볼 예정이다.

다음은 꾸덕한 그릭요거트를 파는 편의점이다. 유청을 제거한 되직한 그릭요거트를 매우 좋아하는데 큰 마트나 요거트만 파는 전문점이 아니면 잘 팔지 않는다. 유통기한도 짧고 가격도 비싸다. 정말 너무 먹고 싶던 날에 그릭요거트를 파는 곳을 찾아 헤맸다. 십 오분 거리에 있는 어느 개인 카페에서 판다길래 걸어가고 있었는데 걷다 보니 이미 카페 마감시간이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되돌아왔다. 얼마 후 아무 생각 없이 생필품을 사러 집 앞 편의점에 갔는데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그릭 요거트가 매대에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선 꽤 자주 그곳에서 요거트를 샀다. 매일 가진 않아도 항상 사는 게 똑같다 보니 주인아저씨가 알아볼 지경에 이르렀다. 자긴 생전 처음 보는 건데 꽤 잘 나간다며 말을 붙이셨다. 나는 요새 많이 먹는다고 격하게 어필했다. 안 그러면 발주를 안 넣어주실 거 같았기 때문이다. 편의점마다 취급 품목이 다르기 때문에 원하는 게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하다.


기대했던 곳 중 하나는 의외로 실망했던 곳은 '불광천'이다. 각종 철새와 오리들이 사는 자연 친화적인 곳이지만 이상한 'K-조형물'이 망쳐놓았다. 휘향 찬란한 빨간 불빛과 되지도 않는 네온사인이 걸려있는 걸 보면 꼭 세금을 저렇게 써야 했나 싶다. 그래도 산책하기엔 이만한 곳이 없다. 그런데 날이 풀리면서 이마저도 못하게 되었다. 날파리라는 불청객 때문이다. 여름에 불광천에서 입을 벌리고 있으면 단백질 섭취를 할 수 있다는 소리까지 있을 지경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눈앞에 점만 한 날파리가 시야를 방해하고 있다. 불광천의 날파리는 익히 알려져 있었다. 작년 여름 나타나 세상을 놀라게 한 '러브버그'의 발현지도 이곳 은평구였다. 벌써 봤다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여름을 나본 적이 없어 두렵다. 전에 살던 집에는 바퀴벌레가 힘들게 하더니만 이젠 러브버그와 날파리라니. 대비를 단단히 해둬야겠다.


좋든 싫든 이곳에서 최소 사계절을 보내야 한다. 어영부영 봄을 보냈고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 환경이 바뀌었다고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뀔 것이란 특별한 기대는 사라졌다. 지금까지의 서울생활을 정리하자면 두꺼운 책을 엄청 빠른 속도로 휘리릭 넘긴 기분이다. 안에 알차고 좋은 내용이 많은데 하나도 안 읽고 바람만 펄럭였다. 지루한 수업시간에 교과서에 낙서를 끄적이는 친구들이 꼭 있었다. 낱장 하나하나에 우스꽝스러운 그림을 그리고 교과서를 빠르게 넘기면 만화 한 편이 나왔다. 0.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서사가 뚝딱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간단하고 알찬 최초의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취직을 하고는 여유가 없어서 낙서를 끄적일 시간도 없었다. 비릿한 종이 냄새만 나는 최근 몇 달의 생활을 돌이켜보니 후회가 된다. 영화처럼 근사한 이벤트는 없더라도 낙서 같은 하루를 살다 보면 하루하루가 모여 희로애락이 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오늘의 낙서 끝! 아이키 언니 나오는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 다시 보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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