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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로마테스 Mar 09. 2023

환희와 낙담 사이에 거리 두는 법

2021.05.28 개인 SNS에 올린 글

0.

어렸을 적 나는 어떤 일이 있든 그 일에 바로 반응했다. 기쁜 일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불었고, 짜증 나는 일엔 불같이 화를 냈다. 자극에 즉각적으로, 그리고 말초적으로 반응하는 내 모습을 보며 아버지께선 다음과 같이 조언하셨다. "사람의 성숙함은 자극과 반응 사이의 간격으로 결정된단다. 성숙한 사람이 되려거든, 어떤 자극을 받든 반응하기 이전에 잠시 마음속의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보렴."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 교훈은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가족들의 7가지 습관'에서 나온 것이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조언이었지만, 수학을 연구하는 지금의 내겐 너무나 큰 보물이 되었다.


1.

수학자들의 인생은 한 마디로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아마 실패의 연속이라는 말이 잔인하지만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이와 관련해 시카고 대학의 위상수학자 파브(Benson Farb) 교수의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파브 교수가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학을 연구할 때 가장 힘든 점은 90%는 실패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90%의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죠."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수학자가 놀라서 되물었다. "아니 교수님께서는 성공률이 그렇게 높으십니까?" 파브 교수는 곧바로 자신의 실언을 정정했다. "아뇨, 아뇨, 사실 부풀려 말했습니다. 그것도 굉장히요." - 출처: https://www.quantamagazine.org/mathematicians-resurrect-hilberts-13th-problem-20210114/


물론 그보다 성공률이 훨씬 높은 수학자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수학자들은 자신이 붙들고 있는 문제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적게는 수일, 많게는 수년을 쏟아붓고 있다. 그동안 떠오른 '유레카!'들은 아마 적은 수가 아닐 것이고, 그들은 대개 다 실패했다.


나 역시 어떤 수학 문제를 붙들고 있다. 운동하다가, 밥을 먹다가, 침대에서 쉬다가, 좋은 아이디어는 불현듯이 찾아온다. 그렇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손에 쥐면 흥분을 주체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들을 실제로 적용해 보면 대개 실패로 귀결된다. 덕분에 책상 한편엔 실패했지만 차마 버리지 못한 아이디어들이 적힌 종이가 수십 장 쌓여있다. (글은 2년 전에 적었던 글이고, 다행히도 지금은 문제를 해결해 냈으며, 그 종이들을 모두 치워냈다. 다만 또 다른 새로운 문제를 붙잡고 있고, 새로운 종이 뭉텅이가 쌓여가고 있다.)


2.

윤태호 작가님의 미생에서 본 글귀로 기억한다. '인생은 끊임없는 반복. 반복에 지치지 않는 자가 성취한다.' 수학자의 인생이 실패의 반복이라면, 수학자에게 필요한 것은 자명하다. 그것은 번뜩이는 영감보단, 실패에 지치지 않는 힘이다. 


하지만 실패에 지치지 않는다는 것이, 실패에 무뎌지는 것이 아니다. 실패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실패는 성공을 위한 초석이고, 실패하는 모든 순간도 내 삶의 소중한 시간인데, 그것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이유라면 너무 감상적인 변명일까.


나는 아버지의 조언을 떠올려, 나만의 실패에 대처하는 습관을 만들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시간을 두듯,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의 환희와 그것이 작동하지 않았을 때의 낙담 사이에 시간을 두는 것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찾아오면, 나는 아이디어를 잊지 않도록 핵심적인 키워드와 방향만 적어둔다. 그리고 잠깐 다른 일에 몰두한다. 음악을 감상하든, 유튜브를 보든, 스페인어를 공부하든, 커피를 마시든, 운동을 다녀오든, 다양한 방법으로 잠시간 나의 시선과 집중을 아이디어로부터 분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렇게 그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다.


흥분감이 사그라들고 머리가 차가워지면 나는 책상 앞에 앉는다. 그리고 내 아이디어를 적고, 그것을 기반으로 논리와 계산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물론 실패 확률은 여전하다. 대개 실패한다. 하지만 나를 아이디어로부터 감정적으로 분리해 내면, 그것에 따른 낙담은, 물론 여전히 존재하다만, 견딜만한 파도가 된다.


덕분에 나는 굉장히 느린 연구자이다. 남들에 비해 훨씬 더 느리게 시도하고 있으므로. 물론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있다면 지금보다 더 큰 효율을 뽑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더 큰 낙담을 더 자주 맞이했을 것이다.


나의 은사님 Rafe Jones 교수님께서 해주신 이야기가 있다. (학부과정 중 정수론 교수로, 현 지도 교수인 Nathan Jones와는 공교롭게도 성씨가 같다.) 그분이 박사과정 1년 차를 마쳤을 때, 패기와 열정이 가득했던 그는 지도교수님을 찾아가 '방학 동안 무엇을 하면 좋을까?'하고 물었다고 한다. 아마 어떤 책을 읽어봐라, 어떤 논문을 공부해 봐라 같은 조언을 기대했던 듯하다. 하지만 지도교수님의 대답은 의외였다. '날도 좋은데 바다에 가서 수영이라도 해보지 그래? 서핑도 나쁘지 않겠군. 모처럼 바닷가에 와서 박사를 하는데 즐겨야 하지 않겠냐?' (그 말씀을 해주신 분은 '그 수학자들은 왜 산꼭대기로 향했나'에 소개되었던 조셉 실버맨 교수이다.)


존스 교수님께서는 석사과정으로 지쳐있던 내게 이 이야기를 해준 뒤 말해주었다. '잠시 수학을 쉬어도 괜찮아. 잠깐 손을 놓아도 괜찮아. 가장 중요한 건, 네가 수학이 싫어지지 않는 것이야. 지금도 잘하고 있으니까. 지금처럼만, 즐기면서 해라.'


3.

새로운 아이디어가 주는 환희와 그것이 실패했을 때의 낙담은 파도와 같다. 내가 수학을 연구하는 한, 그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마루와 골 사이를 서핑하며 누빈다면, 조금은 느리지만 아주 오래 이것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알쓸신잡 3편에 이탈리아 와인 양조사 분께서 농담 삼아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프랑스 사람들은 와인으로 일을 하지만, 저희 이탈리아 사람은 와인과 사랑을 나눕니다." 나도 이것을 오래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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