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완독에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기에 중간에 덮어버린 책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그중 '장미의 이름'이 특히나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저자의 지식과 필력 때문이다. 감히 나는 발 끝에도 미치지 못할 지식의 깊이와 너비. 그 하해와 같은 지식을, 마치 물놀이하듯 너무나 손쉽게 이야기로 풀어가는 능력. 그 둘에 매료된 나는 단번에 움베르토 에코의 팬이 되었다. (정확히는 팬이라 자처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향한 동경의 필요조건은 그가 가진 능력에 경이를 느끼는 것이다. 그것에 부러움이 깃들면동경의 대상은 극복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2.
장미의 이름은 어째선지 국내에서 '첫 문장이 훌륭한 작품'으로 꼽힌다. (아래 문장은 이탈리아어이다.)
Naturalmente, un manuscritto.
당연히, 이것은 수기(手記)이다.
이 선언 뒤로 에코는 뻔뻔하게도(?) 자신의 창작물을 어느 중세 수도사의 기록이라 소개하며 글을 써 내려간다.
이 책을 어떻게 요약해야 할까.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수도원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추리 소설이라 하기엔 책에 담겨있는 에코의 성찰과 철학이 너무나도 방대하다. 내가 기억하고 이해한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 바스커빌의 윌리엄은 합리와 이성을 상징한다. 반면 그를 대적하는 살인마는 독단을 상징한다. 살인마는 세상에 알려져선 안 될 무언가를 숨기려 하고, 주인공은 그것을 밝혀내려 한다. 하지만 살인자 역시 합리와 이성을 따르고, 그것을 수호하려는 종교적 신념에 기반해 일들을 꾸몄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독단과 합리는 각자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그들의 세계는 결국 불타 무너져 버린다.
한 번밖에, 그마저도 몇 년 전에 읽었던 내용이라 그렇게 좋은 요약이 되진 못할 것 같다.
3. 사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첫 문장보다 더욱 사랑한다.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다행히 내 부족한 라틴어 실력으로도 충분히 번역할 수 있는 문구였다.
"이전의 장미는 그 이름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그 허망한 이름들을 붙들고 있다."
덧붙여 이윤기 번역가님의 더 탁월한 번역본을 소개한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이 문장은 12세기의 수도사이자 시인인 클뤼니의 베르나르(Bernard de Cluny)의 시 '속세의 능멸에 대하여(De contemptu mundi)'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Nunc ubi Regulus aut ubi Romulus aut ubi Remus?
Stat Rom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오늘날에 레굴루스는, 로물루스는, 그리고 레무스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지난날의 로마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천년을 견뎌온 강대한 로마도 이제는 이름밖에 남지 않았거늘, 미상불 세속 그 무엇에 미련을 남기랴. (세상을 사갈시 하고, 그 너머의 절대성을 탐람한 어느 수도사의 시 한 구절이 포스트모더니즘적 기법이 가득하다는 장미의 이름의 마지막 문구로 인용되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나는 그의 초연한 냉소가 썩 마음에 들었다. 마치 신문을 읽으며 '쯧쯧, 말세야 말세'를 되뇌는 어른을 멋있다 생각하는 아이처럼 말이다.
4.
초연을 가슴에 품고 스러진 유적을 보노라면 처연한 심정이 가슴속에 피어오른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 덧없는 허망을 지키기 위해 제 목숨을 던졌다니, 간항케도 가엾다는 마음이 앞선다. 그런 처연한 오만에 물들어갈 즘, 나는 그것에 터전을 꾸린 어느 인물을 알게 되었다. 바로 국내 유일의 이집트학 연구소의 곽민수 소장님이다.
이집트학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고대 이집트에 대한 동경으로 이집트학자가 된 그의 삶의 궤적을 보며, 나는 처연한 오만을, 비관적 냉소를 반성하게 되었다. 스러진 것을 덧없다 부르는 것은, 그것에 일터를 세우고, 의미를 발견하는 분들에겐 너무 큰 실례이자 무례였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그것을 열망하고 동경하는 이들에 의해 다시금 재발굴된다. 그리고 다시금 살아 숨쉬기 시작한다.
그것들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실체를 입는 모습을 보며, 나는 베르나르의 초연을 막연히 동경했던 내 자신을 놓아주었다. 세상에 그것을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그 이름은 결코 공허하지 않다. 그 대상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