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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보리 Oct 29. 2023

숲길에서

14. 잉여

  잉여(剩餘)는 ‘남아도는’이라는 뜻이다. ‘나머지’라는 말보다 좀 더 느낌이 강하다. 

  “청년들을 망가뜨리는 것은 잉여시간과 잉여물질이었어요. 다섯 시간 일해서 두 끼를 먹던 사람이 세 시간 일해서 세 끼를 먹은 뒤에는 쉽게 비생산적이고 불건전한 활동에 빠지더군요.”

  오랜 세월 동안 외국에서 난민과 고아의 복지에 헌신해 온 그에게 잉여시간과 잉여물질은 부정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교육을 하여 무지(無知)에서 벗어나게 하고, 동정(同情)에 매달려 구걸하며 살던 사람을 자신의 힘으로 땀 흘려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비교적 쉬웠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비해 돈을 더 벌고 먹을 것을 쉽게 구하자, 건실한 태도를 잃고 흥청대며 몸도 비만해지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기초 지식을 가르치고 배를 채우게 하기는 어렵지 않았으나, 마음의 성숙을 돕는 일은 어려웠던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약쟁이가 된 부유층 자녀’ ‘가산을 말아먹은 부잣집 장손’ ‘타락하여 자멸한 말기의 로마’ ‘갑질하는 가진 자들’이 겹치기로 떠올랐다. 적지 않은 경우 잉여는 풍요의 길이 아닌 수렁의 길로 이끈다.

  잉여를 가진 자는 자신 앞에 어떤 길들이 있는가를 자각하고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본능과 무절제를 따르는 길은 쉬운 길이고, 자제와 지성을 요구하는 길은 힘든 길이다.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의 삶의 색깔과 모양이 결정될 것이다. 

  잉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어떤 것들의 결과물이다. 어떤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한 잉여가 있고 말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결핍을 채운 뒤에도 잉여를 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내일의 결핍에 대한 걱정이 있기 때문이다. 잉여는 일시적으로 사람을 만족시켜 주고 안심시켜 준다. 그러나 그런 평안은 오래가지 않는다.

  인간은 늘 장래를 염려하는 존재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돌이켜 보라. 입학이나 졸업, 취업이나 은퇴가 끝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지 않았는가? 

  시간적 존재인 인간은 장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는 피할 수 없다. 걱정 없이 살기를 꿈꾸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꿈일 뿐 현실이 될 수 없다. 한 목표에 도달하고 나면 언제나 다음 목표가 생긴다. 사람들은 종종 세상에 속고 인생에 속으면서 산다고 말한다. 기실은 세상이나 인생에 속고 사는 것이 아니라, ‘쉼 없이 변하는 삶의 실상’에 어두운 것이다. 아니면 그 무엇에 집착하여 진실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걱정의 굴레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늘 다음에 해야 할 숙제에 매달려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아니다.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수용전념치료(ACT)에 창조적 절망(creative hopelessness, 創造的絶望)이라는 말이 있다. 살면서 원치 않는 상황을 맞게 되면 누구나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겪게 된다. 그때 그 생각과 감정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소용없다. ‘토끼’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토끼가 더 생각난다. 그것은 우리의 인지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우리가 생각과 감정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절망감을 충분히 인정하는 것을 창조적 절망이라고 한다. 이 말을 조금 확장하면, 살면서 걱정과 근심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삶에 슬픔과 고통이 가득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절망감을 받아들이고 인정한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 목표는 어둠 속의 별이 될 수 있다. 그 별은 타락과 고통의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덕분에 가야 할 곳을 향해 걸을 수 있다. 

  잉여는 욕망의 결과이지만, 그 자체는 가치중립적이어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잉여는 그것을 가진 사람이 걷는 길을 따라간다. 수레가 소를 따라가듯이. 잉여물질과 시간을 가진 사람이 오용과 남용의 길을 걸으면 그것들은 오용되고 남용될 것이다. 바람직한 길을 걸으면 그것들은 바람직하게 쓰일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대인 대부분이 잉여의 시간이나 물질을 갖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미 절대빈곤을 벗어났다. 덕분에 내게도 잉여가 있다. 종종 그 잉여의 시간과 재화가 나를 흔든다. 추락을 경험한다. 그때마다 창조적 절망을 받아들이면서 정신을 차리고 내가 띄어 올린 별을 바라보며 걸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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