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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보리 Feb 20. 2024

숲길에서

18. 친절이 행복이다

  언제 어디서 처음 보았었는지 불분명하다. 큰 외숙부가 대처승이었기에 고교 시절 방학 때 외숙부 집에서 보았을 가능성이 높긴 하다. 손에 잡히는 책이면 무엇이건 닥치는 대로 읽던 시기였다. 그때 나는 딱히 할 일도 없고 심심했었던 모양이다. 방안에 굴러다니는 표지가 노랗고 투박해 보이는 책이 눈에 띄자 무심코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불교의 각종 의례와 관련된 내용이 큰 글자로 적혀 있었다. 책 편집은 유치하고 내용은 고리타분해 보였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 처음 한글을 배울 때 읽는 커다란 글자로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해할 수 없는 주문이 잔뜩 실려 있었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이 천수경(千手經)이었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라는 첫 문장에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던 내용이 있어서 호기심이 발동했다. 요술을 부리는 척할 때 쓰던 ‘수리수리~ 얍!’이나, 부정하고 은밀한 거래를 비난할 때 쓰던 ‘사바사바’라는 말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수수께끼 같은 문장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 어떤 존재인지, 수리수리마하수리 등 진언(眞言)이 어떤 뜻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나 같은 고등학생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이런 글을 왜 책으로 만들었는지 까닭을 몰라 답답함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한자로 적힌 내용 아래에 한글번역이 있어서 한자를 잘 몰라도 읽기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도 마땅히 할 일도 없었고, 손에 잡은 책이었기에 억지로 읽어 나갔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로 시작되는 다라니 부분에서는 책을 그냥 덮고 싶었다. 도대체 이게 뭐지?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분량이 적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천수경의 마지막 부분에 사홍서원(四弘誓願)이 있었다.

  ‘사홍서원, 네 가지 큰 소원이라......’

  슬슬 읽어가는 그 순간에도 큰 소원 앞에서는 신중해졌다. 

  ‘음, 큰 소원..... 어떤 것들일까?’

  그 내용이 처음에는 실망스러웠다. 손에 잡히는 그 무엇을 원하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뭔가 모순되는 것 같기도 했다.

  커다란 네 가지 소원 중 첫 번째가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導)였다. 끝없이 많은 고통받는 존재를 구제하기를 소원한다고? 무얼 달라는 내용이 없었다. 아무런 구체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받기는커녕 그냥 한없이 주겠다는 말이 아닌가? 

  ‘소원이란 본래 무언가를 달라는 것이 아닌가? 남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 주기를 소원하다니! 이건 모순이고 위선이 아닌가?’

  짧은 순간 기분이 복잡하였다. 반감(反感)도 들었고, 묘한 감동도 느꼈다. 네 가지 서원 중 끝없는 번뇌를 다 끊고 싶다는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이나, 한없는 법문을 다 배우겠다는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또 위없는 불도를 다 이루겠다는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세 가지 서원은 자신의 유익함을 구한다는 소원이기에 그럴듯한 소원으로 여겨졌다. 반복해서 읽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가없는 중생을 다 건지겠다는 중생무변서원도는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소원이었다. 진실해 보이지 않았다. 무릇 고통받지 않는 생명은 없다. 미약한 한 인간의 힘으로 중생 구제를 다 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런데 왜 중생 구제를 소원하는 것일까? 자신의 유익함이 아닌 타인이나 다른 존재의 유익함에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아름다운 뜻은 이념적으로는 멋있지만 자신의 행복 추구와는 무관한 것이 아닐까? 비록 좋은 소원이지만 어디까지나 종교적 이념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날 이후 그 내용은 오래도록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반전의 순간이 왔다. 딸을 낳아 기르면서 배려하고 헌신할 때 느껴지는 기쁨과 보람의 맛에 눈을 떴다. 주면 기뻤다. 제대로 보살피지 못할 때, 더 아껴줄 수 없을 때 안타까웠다. 유형무형의 어떤 것을 아이에게 건네줄 때, 아이가 그것을 받아줄 때, 아이와 나는 사랑의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깨달았다. 문득 중생무변서원도의 참뜻이 느껴졌다. 이 소원은 명분만 그럴듯한 종교적 이념이 아니었다. 허망한 구호도 아니었다. 삶의 진실이었다. 

  ‘사랑의 참뜻은 오로지 진심으로 사랑해 본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구나!’

  문득 자비심(慈悲心)이 곧 극락(極樂) 세상이라는 통찰에 이르렀다. 자비 즉 극락, 사랑 즉 천국. 남을 구제(救濟)하는 것이 곧 자신을 구원(救援)하는 길이었다. 사랑하면 행복해진다는 뜻 이상이었다. 사랑이 곧 행복이었다.

  친절과 배려는 희생이나 손해가 아니다. 친절한 마음이 극락세상을 열어준다. 친절하면 행복해진다. 이런 상황을 마더 테레사 효과 즉 선행의 효과라고도 말한다. 행복은 찾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 밖 어디에서 얻는 것이 아니다. 비록 불완전하고 부족할지라도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한 그만큼 행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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