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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보리 May 05. 2024

숲길에서

26. 기꺼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고생스럽게 살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다. 떼를 쓰며 죽을 것처럼 울던 아이에게 사탕을 주면 헤헤거리고, 악을 쓰며 길길이 날뛰던 사람도 한 잔 술에 맘을 풀고 ‘세상사 다 그렇지, 뭐.’라며 너그러워지는 것을 보면 사는 것이 좋긴 좋은 모양이다. 

  사람들은 욕심도 많다. 백 가지 즐거운 일이 있었어도 한 가지 서운한 일이 있으면 거기에 마음이 걸리고, 꽃밭에서 살면서도 개똥밭에서 한 번 넘어졌다고 화들짝 놀라 소동을 피우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머리 굴리기 선수다. 즐거움과 편리성을 추구하는 마음 이면에는 고통과 불편을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속셈이 들어 있다. 개똥밭을 만나도 이왕이면 짧게 만나기 위해서 온갖 보험을 만들고 노후를 대비하여 연금을 준비한다. 대단한 준비성이다. 

  고통과 위기를 충분히 대비하면 완벽하게 피할 수 있는가? 없다. 고생스럽게 살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더 낫다는 뜻을 담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은 너무 고통스러워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의 심정을 담지 못한 말이다. 자잘한 불편에서부터 극심한 고통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통은 피할 수 없는데, 아무도 피할 수 없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 주변 사람들은 이런 불편과 고통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기꺼이 불편과 고통을 받아들일 각오를 하고 어려움에 대응한다. 

  수차례의 수술을 거치고 힘겹게 항암제 투여를 하면서 암과 씨름하는 지인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많이 힘들 텐데 어떻게 그렇게 편하게 전화를 받을 수 있어?”

  그의 대답은 간단하였다.

  “하하하. 당하면 그냥 견디는 수밖에 없지 않아?”

  처음에는 두렵고 잠도 오지 않았단다. 가족의 장래가 염려되고 미안하여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죽을 각오를 하고 나니 온갖 귀찮은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단다. 물론 아프고 힘들기는 하지만 다른 길이 없었단다. 

  나는 엄살이 많은 사람이다. 사소한 불편도 참지 못하고 요령을 찾기 일쑤다. 아내가 시장에서 쪽파를 사 오면 불쑥 싫은 마음이 생긴다. 손질하는 일이 귀찮아서 그렇다. 때로 파김치를 담기 위해 많은 양을 사 오면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진다. 짜증도 난다. 양이 많으면 다듬는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있다. 

  ‘외할머니께서 말씀하셨지. 눈은 게으르단다. 하다 보면 한단다.’

  일감이 있고 긴 시간 동안 일을 해야 할 것 같으면 미리 이런저런 준비를 한다. 먼저 좋아하는 음악을 튼다. 일을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도 버린다. 그냥 일이 끝날 때까지 매달릴 각오를 한다. 담담하게, 천천히, 꾸준하게, 음악을 들으면서 일을 한다. 하다 보면 결국 일감이 다 떨어진다.

  명절이나 휴가철에는 그저 집안에 처박혀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장거리를 이동해야 할 때면 꽉 막힌 도로에서 고생할 각오를 한다. 4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을 8시간이 넘게 걸려서 가려면 우선 몸이 힘들다. 몸이 힘들면 맘도 힘들어진다. 이럴 때는 이렇게 마음을 다잡는다.

  ‘가다 보면 언젠가는 도착하겠지. 8시간이 아니라 12시간 안에만 도착하면 다행이지 뭐.’

  출발하기 전에 미리 힘들 것을 각오하면 덜 힘들게 느껴진다. 내가 나를 달래고 속이는 것이다. 

  등산을 할 때면 종종 가파른 오르막길을 만난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역시 또 마음 준비를 한다.

  ‘천천히 조금씩 걷자. 노래도 있지 않아?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고.’ 힘든 오르막길에서는 보폭(步幅)을 짧게 한다. 속도를 늦춘다. 시간을 재지 않는다. 발끝만 보고 걷는다. 산과 내가 한 몸이라고 여긴다. 힘들게 오를 각오를 한다. 

  소통을 잘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내 견해를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 상대방의 견해가 좋으면 승복할 준비를 한다. 얼른 승복할 준비가 안 되면 이렇게 생각한다.

  ‘그냥 들어보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끝까지 잘 들어보자. 듣다 보면 뭔가 다른 대안이 나올지도 몰라.’

  헤어지는 것도 두렵고, 헤어지고 싶을 때 쉽게 헤어지지 못하는 것도 두려워 이성(異性)과 교제하는 것을 피하는 사람에게 ‘상처받을 각오를 하라.’고 조언하는 책도 있다.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언제나 어렵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아무리 어려워도 한 발을 내딛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삶이다.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늙고 아프고 죽는 것은 아무도 피할 수 없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은 늘 다가온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마땅히 책임져야 하는 일도 많다. 원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냥 기꺼이, 마치 자신이 직접 선택한 것처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자신의 팔자(八字)로 여기면서.

  본디 삶은 슬프다. 부조리(不條理)하다. 모든 생명체는 원치 않게 삶을 받았다. 자신이 원한 삶이 아니었지만, 어쩌다 주어진 삶이지만,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온갖 고통은 삶에서 유래(由來)한다. 삶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 산다는 것은 고통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삶과 고통의 현실을 마주할 때 회피(回避)할 것인가 아니면 마주 대할 것인가? 

  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방법은? 기꺼이 건너는 것이다.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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