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의 역사 17
- 드라마 출연, 나우 라디오 방송
2019년 가을에 배우는 새 드라마에 캐스팅되었다.
브라운관 복귀는 4년 만이었다.
이번 드라마는 살인범을 쫓는 스릴러였는데, 상대 남자 주연 배우가 연극 무대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아 방송으로 진출한 지 얼마 안 된 배우라 신선하게 느껴졌다.
전작들과 달리 공중파가 아닌 케이블 드라마인 점도 좋았고, 정통 스릴러가 아니고 코믹 요소가 가미된 점도 기대를 갖게 했다.
1,2화를 보고 나는 정말 오랜만에 드라마 리뷰를 정성스럽게 썼다.
나는 드라마나 영화, 책 리뷰를 카페에 올릴 때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평소엔 장난기 가득한 가벼운 글을 주로 썼지만, 가끔씩 정제되고 정돈된 글을 쓸 때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업이 이 거구나하는 걸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희한하게도 내가 진지 빨고 쓰는 글을 덕후들도 좋아했다.
배운 사람 느낌이 난다고 칭찬도 하고, 좋은 글이라며 댓글도 많이 달아 주었다.
나는 이번 드라마는 꼭 마지막 화까지 제대로 된 리뷰를 쓸 수 있기를 바랐다.
드라마가 완성도가 있어야 리뷰를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의 바람은 여지없이 또 무너지게 되었다.
드라마가 또 용두사미형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도 배우와 덕후들은 신이 나 있었다.
완전 망작이 아니었고, 배우가 작품을 하는 동안 활발히 인스타를 통해 소통을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 또한 이제 마음을 많이 내려놓고 있었다.
시대가 많이 변해서 시청률이 의미 없어진 지 오래였고, 예전처럼 대박인 드라마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TV로 드라마를 보지 않았고, 본방을 보지도 않았다.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다양한 장르를 다양한 방식으로, 각자 원하는 시간대에 시청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드라마가 연말에 종영을 하고 나서 얼마 안 됐을 때, 배우가 네이버 나우에 출연하게 됐다.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갑자기 한다고 해서 다들 우왕좌왕하고 있었는데 그게 안쓰러웠는지 배우가 인스타에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 신문물에 약하다고 자조스럽게 얘기한 것을 보고 정확한 시간대와 주소를 알려주었다.
방송은 자정이었고 나는 잠을 안 자고 기다렸다.
오디오로만 진행되는 방송이었는데 사전에 문자 메시지로 질문을 받고, 실시간 댓글창이 열려 있어서 바로바로 소통도 가능했다.
역시나 대부분 덕후들이 들어와 있었다.
처음엔 긴장한 거 같았는데, 점점 페이스를 찾아가서 편안하고 잔잔하게 멘트를 이어갔다.
팬들이 질문한 내용들에 정성스럽게 답변을 하고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댓글에도 피드백을 잘해 주었다.
나중에 라디오를 진행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본인이 직접 선곡한 노래들도 틀어 주었다.
나도 문자로 세 개의 질문을 보냈었는데 두 개나 뽑혀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친구와 수다를 떠는 것처럼 편안하고 유쾌했다.
시간의 힘인 것 같았다.
배우 본인도 팬들과 이제 같이 늙어가는 처지로 생각되고, 팬들이 안쓰럽고, 항상 고맙게 여겨진다고 밝혔다.
나도 배우에 대한 마음이 다르지 않았다.
자주 이런 직접적인 소통의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020년이 시작되고 배우는 휴식기를 갖었다.
생일에 간단히 선물을 보냈는데, 그게 너무 고마웠는지 카페에 글을 올렸다.
근데 글의 어조가 너무 평상시 배우답지 않아서 다들 의심을 하며 사칭이라고 꺼지라고 댓글을 달았다.
그런데 댓글로 억울하다며 자신이 예전에 가입한 비번을 까먹어서 고정닉을 못 달고 쓴 거라고 했다.
의심병자인 덕후들이 그럼 인스타로 인증을 해 보라고 했는데, 인스타에 덕후들이 제시한 문구가 올라와서 다들 진짜 배우가 맞았다며 막말을 했던 애들은 석고대좌를 해야 했다.
그 후로 배우는 카페에 댓글도 수시로 달고, 글도 가끔씩 쓰고 했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글 하나하나, 댓글 하나하나까지 읽고 기억했다.
카페에서 오래 활동했던 덕후들의 닉은 대부분 다 알았다.
불쑥 들어와 반말로 댓글도 달고, 때론 놀리기도 하면서 같이 놀았다.
내가 쓴 글에도 댓글을 달았고, 댓글에서 날 거론하며 스스럼없이 장난을 걸어오기도 했다.
덕질 10년 만에 띠동갑의 배우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특히 내가 쓰는 글 중, 시를 소개하거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는 글들을 유독 좋아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내가 그날따라 컨디션이 유독 좋아 드립력을 발산해서 재미있는 댓글을 썼는데, 나의 센스때문에 날 너무 좋아하고, 내가 올리는 시나 글도 너무 좋아한다고 댓글을 써서 사랑고백을 받았다고 덕후들이 부러워하기도 했다.
이게 덕질의 보람이자 즐거움이었다.
수많은 불특정 다수로 나를 모를 땐, 짝사랑하는 것 같아서 별로였는데 덕질의 대상이 날 알아봐 주고 좋아해 주니 너무 행복했다.
나는 일방적인 관계를 너무 싫어하는 사람이었는데 나의 바람대로 일방이 쌍방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물론, 온라인상에서 말이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오프에서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고 고마움을 전하리라 혼자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 날이 머지않아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