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의 역사 16

- 잔잔한 시간들

by 박드레

2019년 봄까지 배우는 연기를 쉬었다.

대신 동물 다큐와 예능에 출연을 했는데, 아마도 쉬면서 이것저것 관심이 가는 영역에 도전해 보는 것 같았다.

동물 다큐는 아르헨티나까지 가서 펭귄의 생태계를 관찰하는 형식이었는데, 여행도 하고 동물도 볼 수 있는 기획이라서 출연했다고 인터뷰를 했다.

비슷한 연령대의 세 친구가 펭귄의 생활을 관찰하고 카메라에 담는 내용을 촬영하는 콘셉트이었다.

숙소에서 같이 생활하며 종류가 다른 펭귄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생태를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배우는 새롭고 경이로운 동물들의 모습에 많이 감탄하고 때론 감동을 받기도 했다.

자신들의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더 꿋꿋이 삶을 이어가는 펭귄들의 모습에서 배울 점이 있었다.

배우들의 감성은 남달라서인지 펭귄들의 모습을 보며 울기도 했다.

멀고 먼 세상의 끝에서 자연과 맞서며 때론 자연에 순응하며, 본능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동물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던 거 같다.

다큐 속의 배우는 배우가 아닌 인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모습, 세상 사람들은 잘 모르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다큐에 갑자기 출연한 것 부터가 의외성이 있는 사람이구나 싶었는데, 다큐에서 보여지는 모습에서 배우의 천성과 세계를 대하는 태도가 그대로 나타났다.

재미있게 시청했다.

방송되는 내내 그곳에서 찍은 자신의 모습, 자연의 모습, 펭귄들의 보습 등을 인스타에 올려 주었다.



다큐가 끝나고 배우는 예능에도 출연했다.

웃고 떠드는 예능이 아니라 역사적 장소를 찾아 의미를 되새기는 예능이라서 유익했다.

아마도 그런 예능이었기에 출연을 결정했을 것이다.

평소에도 역사나 고전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유명 역사 강사와 연예인들로 구성된 팀이 역사의 현장을 방문하고 역사를 되짚어보는 내용이었는데, 배우는 유일한 여성 게스트로 톡톡히 감초 역할을 다했다.

미리 역사 공부도 하고 준비도 해 와서 강사의 질문에 대답도 척척 잘했다.

아무 생각 없이 참여하는 스타일이 아니기에 집에서 많이 준비하고 왔을 것이다.

공부에도 소질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는 배우를 보며, 배우가 안 됐음 교사를 해도 좋았을 사람이라고 가끔씩 생각했었다.

교사도 배우와 잘 어울리는 직업이었다.

어쨌든 연기를 쉬는 동안 배우는, 시대의 추세에 맞게 다른 영역으로 시선을 돌려 활동 범위를 넓히는 등 바람직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진지한 면이 많은 사람이라 예능감은 좀 떨어졌지만, 자세나 열정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런 자세라면, 뭐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외도 아닌 외도를 하면서도 쉬지 않고 인스타를 통해 소통해 주고, 팬들을 격려해 줬다.

점점 더 배우가 좋아졌다.

연기자로서도 너무 좋았지만 인간으로서도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연예인 덕질을 하면서 나이 먹고 뭐 하는 짓인가?라고 자문했던 적도 꽤 있었다.

가수도 아니고 연기자를, 그것도 여성 연기자 덕질을 한다는 것 자체를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남편에게도,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대놓고 오픈해 본 적이 없었다.

창피하거나 그래서라기 보단,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세계 하나는 지니며 살고 싶었고. 그걸 타인에게 이해받거나 하고 싶지도 않았다.

처음엔 연기가 너무 좋아서 시작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배우의 인간적인 면모와 인성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나와 내면이 비슷한 면도 많았다.

지켜보면 볼수록 그 사람이 이해가 됐고, 신뢰가 갔다.

10년을 지켜보고 판단하자고 다짐했지만, 8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결같이 겸손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점점 더 좋은 점수를 매기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카페에 이런 패러디를 올렸다.




백 년/ 이병률

백 년을 만날게요
십 년은 내가 다 줄게요
이십 년은 오로지 가늠할게요
삼십 년은 당신하고 다닐래요
사십 년은 당신을 위해 하늘을 살게요
오십 년은 그 하늘에 씨를 뿌릴게요
육십 년은 눈 녹여 술을 담글게요
칠십 년은 당신 이마에 자주 손을 올릴게요
팔십 년은 당신하고 눈이 멀게요
구십 년엔 나도 조금 아플게요
백 년 지나고 백 년을 한 번이라 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을 보낼게요



십 년은 오프를 뛸게요
이십 년은 갤에서 덕질할게요
삼십 년은 다초점 렌즈로 바꿀게요
사십 년은 당신을 잘 보기 위해 와이드 티비를 살게요
오십 년은 더 잘 보기 위해 백내장 수술을 할게요
육십 년은 쓰러지지 않게 운동할게요
칠십 년은 당신이 아프지 않은지 체크할게요
팔십 년은 팬 미팅 가기 위해 인공관절 수술 할게요
구십 년은 나도 쫌 아플게요
백 년 지나고 백 년을 한 번이라 칠 수 있다면
두 번째 생에서도 덕질할게요



이런 패러디 글을 쓰고 나는 덕후들로부터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





덕질 인생의 2막은 이렇게 겉으론 잔잔하면서
속으론 태풍의 씨앗을 만들어가며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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