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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드레 Mar 29. 2024

나는 무엇으로 증명될까

어제 다시 한번 읽은 책이 있었다.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이었다.

최진영 작가는 2006년에 등단한 이후로 2010년 첫 장편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으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자신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렸다.

2023년 <홈 스위트 홈>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고 , <구의 증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장해서 <단 한 사람>, <해가 지는 곳으로>, <오로라>, 그리고 2024년 <원도>까지 꾸준히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온 실력 있는 작가이다.

그중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소설이 바로 <구의 증명>이다.

비교적 짧은 분량의 이 소설은 흡인력이 있고 서사가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게 묘사가 되어 금방 읽게 된다.

나는 두세 시간 만에 완독을 했다.

내용이 가볍지 않고 상당히 충격적인 부분들도 많다.

하지만, 작가가 둘의 사랑과 서로를 대하는 방식을 충분히 설득력 있게 그리고 있어서 큰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구의 증명>은 ‘구’와 ‘담’의 전 생애에 걸친 사랑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하는 ‘사랑’은 일반적인 연인들의 사랑과 다르다.

또, 단순한 연인 사이로 둘의 관계를 규정하기엔 그 표현이 너무나 부족하다.

여덟 살부터 시작된 둘의 관계는 ‘소울메이트’ 그 이상으로 서로가 있어야만 존재의 가치가 완성되는, 그런 특별한 관계이다.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완벽하게 이해해 주고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관계.

피를 나눈 혈연의 사이에서도 가질 수 없는, 함께 있음으로 세상에서 살아갈 의미가 부여되는 관계.

둘의 운명은 그렇게 맺어져 있었다.

비구니였던 이모의 손에서 자라던 ‘담’과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부모를 가져 그것을 그대로 대물림하며 사는 ‘구’.

그 둘은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둘은 서로를 빨리 알아볼 수 있었고, 둘이 함께 있으므로 시궁창 같은 세상에서 견딜 수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언제나 붙어 다녔던 둘의 관계를 둘러싼 지저분한 가십들로 인해 한때는 둘이 멀어졌지만, 언제나 서로를 그리워하고 갈망했기에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빚을 갚기 위해 뭔가를 할수록 빚을 더 지게 되는 부모로 인해 어린 ‘구’는 돈이 되는 일은 뭐든지 해야 했다.

남들은 대학을 꿈꾸고 미래를 계획할 때 ‘구’는 하루하루를 네다섯 시간밖에 못 자며 일을 해야 했다.

처음부터 가진 것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은 평생을 열심히 일해도 결코 나은 삶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없는 사회 구조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구’의 삶이다.

그런 사회적 약자들에게 사법적인 보호나 안전망은 먼 이야기일 뿐이다.

사채업자들에게 두들겨 맞던 ‘구’가 경찰서로 도망을 치지만 결국 경찰도, 국가도 ‘구’를 도와주지 않았다.

물질과 권력이 법보다 우위에 있는 우리 사회에선 정직하고 힘없는 약자는 포식자에게 쫓기는 먹이일 뿐이다.

그런 ‘구’에게 유일한 희망이자 버팀목은 ‘담’이다.

‘담’은 언제나 한결같이 ‘구’를 기다려주고, 지지해 주고, 사랑한다.

‘구’의 이름의 의미는 아무리 노력해서 현실을 벗어나려 해도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구의 형상처럼 ‘구’의 삶도 반복되는 것을 의미하고, 담장처럼 그런 ‘구’의 삶을 안전하게 막아주는 사람이 ‘담’이라서 그렇게 명명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구’와 ‘담’이 동생처럼, 혹은 자식처럼 아꼈던 ‘노마’가 사고로 둘의 눈앞에서 죽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구’는 그 후유증으로 ‘담’을 떠나 방황하고 다른 여자를 만나다가 군대를 도피처로 삼아 말도 없이 자원입대한다.

그래도 ‘담’은 이모의 장례를 혼자 치르고 묵묵히 ‘구’를 기다린다.

‘구’의 유일한 안식처가 자신 뿐임을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기에, 자신에게도 역시 ‘구’만이 온전히 자신을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존재이기에 기다린다.

세상에 혼자 남은 ‘담’에겐 ‘구’가 유일한 가족이며,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증명해 줄 유일한 사람이다.


둘은 다시 하나가 되어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 보려 하지만 세상은 둘을 자꾸만 벼랑 끝으로 내몬다.

성인이 되어 부모의 빚을 그대로 상속받게 된 ‘구’를 사채업자들이 끈질기게 괴롭힌다.

처음엔 그들이 하라는 대로 일을 하고 빚을 갚기 위해 노력하지만, 일을 해도 해도 빚은 줄지 않는다.

세상의 정상적인 셈과 법칙은 ‘구’에게 작용하지 않고 ‘구’는 점점 피폐해져 간다.

사채업자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지방으로 ‘담’과 함께 도망쳐 노마가 되고 싶다던 ‘울트라 캡송 아빠’를 꿈꿔 보지만 사채업자들은 ‘구’를 어김없이 찾아낸다.

사채업자들이 찾지 못하는 깊은 산골에서 청설모처럼 숨어 살자고 하는 ‘구’와 함께 ‘담’은 깊은 산골로 숨어 들어가서 산다.

그러나 결국 ‘구’는 그들에게 발각되어 쫓기고 구타당하다 도망쳐 길바닥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그런 ‘구’를 ‘담’이 발견해 집으로 업고 온다.


'담'은 죽은 ‘구’를 태울 수도, 묻을 수도 없어서 깨끗이 씻기고 그의 몸을 천천히 먹어 없애는 것으로 혼자만의 장례를 치른다.

그런 ‘담’의 장례 의식을 ‘구’의 영혼이 옆에서 지켜보며 각자의 시선에서 둘의 사랑의 과정을 서술하는 구조가 슬프고도 처절하다.

사랑했던 연인을 먹는다는 것은 엽기적이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이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담’이 왜 그런 기괴하기 짝이 없는 장례 절차를 밟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구’의 삶은 그 누구에게도 존재의 가치나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한 삶이었다.

그저 돈을 벌어다 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최소한의 애정과 인간으로서의 존중도 받지 못하는 존재로 살다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로 길바닥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누구나 사람답게 살아갈 권리가 주어 지지만, ‘구’에겐 그런 권리가 없었다.

세상은 ‘구’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 ‘구’의 삶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직 ‘담’뿐이고, ‘담’은 자신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인 ‘구’를 기억하며 그의 신체를 하나하나 먹어 없앰으로써 ‘구’와 함께 했던 자신의 삶을 봉인하며 자신의 몸속에서 함께 살아 숨 쉬는 ‘구’를 영원히 박제한다.


그 장례 의식은 ‘담’에게 너무나 고통스럽고 감당하기 힘들지만, 자신을 때려 가며 그 의식을 끝까지 완성하려 한다.

‘구’의 신체를 먹는 자신이 사이코든 변태성욕자든 식인종으로 인식되든 그런 건 ‘담’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다만. 세상에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일생을 고단하고 힘들게 살았던 ‘구’를 영원히 기억하고 그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명을 ‘담’만의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담’이 ‘구’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구’의 삶을 반추하고, ‘구’가 살았던 세상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은 단순히 ‘구’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구’를 증명해야만 자신의 존재 역시도 증명할 수 있게 된다.

‘담’에게 ‘구’가 없다면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설명할 수 없기에 그 의식은 ‘담’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국 구를 증명하는 것이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자신만의 고통스럽고 끔찍한 장례를 해내는 ‘담’을 바라보며 ‘구’의 영혼은 장례를 끝내고 ‘담’이 오래도록 살아가기를 바라고 바란다.

‘담’이 살아야 자신도 ‘담’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소설은 단순히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내 존재를 증명받고, 그로 인해 세상을 살아갈 의미를 얻어가고 인생을 완성해 가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였다.

누구나 세상 가운데 홀로 살아가기 힘들다.

그렇기에 자신을 알아봐 주고 끝까지 믿어주고 아름답게 여겨주는 단 한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모두 그런 존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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