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캠프와 RYM이라는 극도로 비의도적인 경로로 유명세를 얻은 한국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 파란노을은, 두번째 앨범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에서 자신을 '찐따 무직백수 모쏠 아싸 병신새끼, 사회부적응 골방 외톨이'라 칭한 바 있다. 이 직선적인 열등감의 향수는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청취자 뿐 아니라 감정적 지지자까지 얻을 수 있었다. 사실, 앨범의 성공은 방구석에서 노트북 하나로 모든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아마추어 창작자에게는 극히 드문 정도의 것이었다. 폭발하듯 쏟아지는 하이프와 비난, 앨범 매진 그리고 Pitchfork의 유려한 리뷰까지. 밴드캠프 등지의 락스타 지망생들이 희망은커녕 몽상이나 할 수 있는 것들을 파란노을은 모두 이룬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그가 새 앨범을 계속해서 발표하고 공연장을 관객으로 가득 채우며 새로운 세대의 락스타가 될 수만 있다면야, 물론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그가 성인이 되어 깨달은 '21살이 될 동안 기타를 한 번도 잡아본 적 없고, 노래 실력도 형편없으며, 키와 외모도 평균 이하'인 현실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매일 보던 그 흰 천장을 보며 잠에서 깨는 나날들이 똑같이 이어질 뿐인 현실 앞에서, 이 비상업적이며 그만큼 진정성 넘치는 앨범 하나의 예외적인 성공은 무엇을 보장해줄 수 있을까.
비록 앨범이 부적응과 현실도피, 자기혐오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상당히 여과없이(혹은 노골적으로)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거칠게 믹싱된 중얼거림이 언젠가 노랫말로 인식되는 그 순간까지 참을성을 발휘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감정들이 다루어지는 관점만큼은 결코 자기파괴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무언가를 미워한 채 무언가를 갈망하고 / 땀도 흘리지 않은 채 어리광을 부리’는 유아적 전능감이든, ‘어제는 오늘 같고 오늘은 내일 같고 / 내일은 어제 같고 달라진게 없’는 비적응적인 생활에 대한 회의감이든 간에, 그것이 묘사되는 방식에는 쉽게 섞여들어갈 법한 자조도, 자기연민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그저, 의식의 저편에서 그에게 끊임없이 상기하기를 요구하는 곪은 기억과 감정들을 느껴지는 그대로 묘사할 뿐이다.
왜 그는 기피되기 쉬운 부정적인 감정들을 숨기거나 우회적으로 표현하려 시도하는 대신 폭발시키듯 터뜨려버리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방식으로 작업물을 발표하면서도 동시에 락스타가 되고 싶다는 시대착오적인 꿈을 꾸는 것일까? 파란노을은 라이너 노트에 "저는 듣는 이에게 달콤한 위로를 해 줄 생각은 없습니다. '언젠가는 잘 될거야' 같은 말을 꺼낼 수 없습니다. 단지 세상에 저와 같은 행동하는 찐따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라 밝힌 바 있다. 이러한 관점은 <아름다운 세상>에서도 나타나는데, 그는 언젠가는 잘 될 것이라는 식의 희망적 태도를 '두 눈과 귀를 막아버리'는 것이라며 거부한다. 대신 그는 창작이라는 과정을 통해 수면 아래의 감정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담대하게 자기자신을 고백함으로써 희망적이고 달콤한 위로로는 닿을 수 없는 감정적 차원의 깊은 공명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그가 2000년대 홍대의 인디 음악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할 용기를 얻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도 이 자기이해의 과정에 참여하기를 청한다.
그가 ‘골방 외톨이’와 ‘락스타’ 사이의 괴리를 인식하면서도 여전히 발버둥쳐보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이 자기이해와 공명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 데뷔 이래로 계속 유지해온 익명성을 깨고, 영감을 주고받던 동료들과 함께 무대에 설 결심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아날로그 센티멘탈리즘을 통해 함께한 지난 날의 추억을 노래하고 팬들에게 격려를 보내는 그는, 누군가에게 평생 기억되고 회자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던 꿈을 이미 이룬 것처럼 보인다.
파란노을은 자신의 블로그에 "이 앨범은 자기혐오에 대한 앨범이지만, 모순적으로 나는 앨범을 완성하고 나서 비로소 무언가에게서 졸업하게 됐다"라고 썼다. 어느 모로 보든, 그가 음악을 통해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이 그의 청취자들 뿐만은 아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귓가를 넘어 가슴 속 깊은 곳까지 맴도는 일렁임을 만들어내기 위해 혼란스레 뒤엉킨 기억과 마주하고 자기이해와 고백으로 나아갈 때, 그 힘들었던 지난 날들은 보편적인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