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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조교 Mar 17. 2024

9.11 테러, 텅 빈 무대와 채워지는 인류애

뮤지컬 <컴프롬어웨이> 퇴근길 리뷰

911 테러 (wikipedia)

2001년 9월 11일. 2대의 비행기가 뉴욕 맨해튼의 빌딩을 뚫고 지나갑니다. 테러범들이 납치한 항공기의 탑승객은 물론 비행기가 충돌한 무역센터에 있던 2600여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바로 역사상 최악의 테러로 불리는 9.11 테러죠.

뉴펀들랜드 갠더 공항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미국 공항에 착륙하지 못하고 대서양 상공을 선회하던 비행기는 자그마치 400여 대. 그중 약 7000명의 사람을 태운 38대의 비행기가 캐나다의 작은 마을 뉴펀들랜드 갠더 공항에 비상 착륙을 하게 됩니다. 


승객들은 영문도 모른 채 비행기 안에서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었고, 뉴펀들랜드 사람들은 공항 근처 지역 인구의 2배가량 되는 이재민을 갑작스레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그런데 그들의 눈앞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국가, 종교, 인종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선의를 베푼 뉴펀들랜드 시민들

몇 시간 사이에 근처 여관, 고등학교, 사무실이 피난처가 되었고, 민가에서는 임산부와 노약자들을 보살피기 시작했죠. 심지어 파업을 하던 버스 노조가 구호 활동을 위해 파업을 잠시 멈추는 등 뉴펀들랜드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7000명의 이재민들에게 조건 없는 선의를 베풀기 시작하는데요. 

뮤지컬 <컴프롬어웨이> 한국 초연 포스터 (쇼노트)

뮤지컬 <컴프롬어웨이>는 테러라는 재난 속에서 이방인들과 뉴펀들랜드 원주민들이 마주하게 되는 따뜻하고 유쾌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2017년 미국 최고 권위의 공연 예술 시상식인 토니어워즈에서 작품상을 포함한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해 화제의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이 상을 싹쓸이해갔던 탓에 연출상 수상에 그치고 맙니다. 물론 한 부문이라도 수상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업적이죠.


과연 공연은 촌각을 다투는 그날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냈을까요?

공연은 텅 비어있습니다. 화려한 무대 장치나 전환조차 없습니다. 오직 12명의 배우가 자신이 맡고 있는 의자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의상을 바꿔가며 비상착륙한 승객(또는 승무원)과 뉴펀들랜드 원주민을 번갈아가며 연기하는데요. 기본적으로 배우 1인 당 3개 배역 이상을 맡고 있습니다. 

<컴프롬어웨이> 한국 초연. 논레플리카(음악과 대본만 수입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어 원작과 무대가 다름

쉴 틈 없이 무대를 옮기고 배역을 바꿔가며 연기하는 배우들의 모습은 마치 빠르게 부싯돌을 비벼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점점 달아오르는 열기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작은 스파크 튀더니 이윽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무대를 가득 채워내기 때문입니다.


즉, 이 공연이 비어있어야 했던 이유는 채워져야 했기 때문이고,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서서히 관객들의 눈에 선명하게  보여야 했기 때문인데요.


공연의 시작, 테러로 인해 부지불식의 사람들이 하나의 공간 ‘뉴펀들랜드’에 당도합니다. 사람들은 ‘ 국적, 인종, 젠더, 종교, 정치 등 인간이 스스로를 옭아매기 위해 구분해 둔 것들로 뒤엉켜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모든 갈등의 씨앗이 된 것들이죠. 심지어 테러라는 불안 속에서 피어난 갈등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처럼 위태롭습니다. 

그러나 엉켜있던 실타래가 풀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실마리 역시 '인간'이기에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선의’였습니다. 인물들은 죽음 앞에서 나약해지고, 삶 속에서 환희와 고통을 동시에 느끼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뉴펀들랜드 사람들의 조건 없는 환대를 통해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공연 내내 ‘막연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던 실타래가 풀리고, 서로의 조각을 내어주던 인물들이 보이지 않는 빨간 실로 매듭지어지는 여러 순간들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결국 인물들은 겹겹이 포개지는 다정한 온기 속에서  ‘어디도 아닌 곳’에서 잠깐 동안 현실의 불안을 잊고, 더 나아가 그간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정체성을 마주하기도 하는데요. 예수님이 빵을 복제하는 기적을 보듯, 텅 비어있던 무대는 어느새 다정함으로 따뜻하게 들끓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채워집니다. 

공연 중간, 우리는 너무나도 익숙한 음악의 가삿말을 마주하게 됩니다. 실제로 넘버가 많이 없는 뮤지컬임에도 끊임없이 반복되어 리프라이즈(?) 되는 노래가 있는데요. 바로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곡으로 알려진 “My Heart Will Go On"입니다. 어쩌면 반복되는 셀린 디온 노래의 가사가 이 공연의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메시지처럼 느껴집니다.


Near, far, wherever you are
I believe that the heart does go on
가까이, 멀리, 그대가 어디에 있든
나는 사랑이(그리고 삶이) 계속될 거라 믿어요.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셀린 디온의 노래를 들으며 염려와 불안 속에서 건네받은 서로의 한 조각이 서로의 삶과 사랑의 일부가 되었던 다정한 순간을 다시 한번 곱씹어봅니다. 

뮤지컬 <컴프롬어웨이> 2019 올리비에 어워즈 축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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