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도로는 내 대학시절 등하굣길 추억이 녹아 있는 통학길이다.
당시 5.16 도로는 한일여객만이 운행하고 있었다. 키 큰 사람들은 허리를 제대로 펼 수도 없는 20인승 마이크로버스다. 중앙로터리에 있는 서귀포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 산천단 조금 지난 제주대학교 입구까지 직행이다. 한 40~50여분 소요된다. 제주시내를 경유할 필요가 없는 최단시간 노선이기에 시간이나 비용면에서 최적이다. 그래서 통학을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버스 안에서 늘 만나는 학생들끼리는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종착지에 내려서는 막걸리나 차도 한잔하고 서로 동료가 되기도 했다.
제주는 날씨가 무척 다양하기에..
제주도가 섬이라는 특성과 제주도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한라산의 영향으로 날씨는 매우 변덕스럽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비가 오기에 우산을 챙기고 버스를 탔는데, 한라산을 넘어서 막상 학교 앞에 내릴 때 햇빛이 쨍쨍 인 경우가 종종 있다. 햇빛에 쨍쨍인데 우산을 들고 학교를 가면 좀 이상한 사람이 된다. 사실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귀찮기도 하지만 눈총을 받는 것이 싫다. 다행히 버스 정류장인 학교 입구에는 커다란 꽃밭이 있었다. 꽃들과 키가 작은 관목들로 빽빽하게 들어선 아담한 꽃밭이다. 밖에서 볼 때는 그 가운데 무엇이 있는지를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곳이다.
일단은 집에 갈 때 가지고 갈 생각으로 우산을 꽃밭 사이에 숨긴다. 잠깐이면 되고 밖에서 누가 알아채릴 수도 없다는 생각에서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등교를 한 날, 그런 날은 이상하게도 과친구들과 소주 한 잔을 할 일이 생긴다. 학교 정문에서 버스를 타면 제주시내까지 직행이라서 학교 입구에 아침에 숨겨놓은 우산을 챙겨 갈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사실 그다음 날이 언제가 될는지는 모른다. 비가 와야 우산을 가져갈 수 있기에 말이다.
어느 날 서귀포에서 출발할 때 비가 안 와서 우산 없이 학교에 왔는데, 버스를 내리자마자 비 오는 날이 있다.
이런 날은 무조건 정류장 앞의 꽃밭으로 내 닫는다. 누군가 숨겨 놓은 우산을 챙기기 위해서다. 마침 지난번 우요일날 내가 꽃밭에 숨겨 놓은 우산을 내가 찾는 다면 진짜 운수 좋은 날이다. 습관적으로 정원의 꽃들 사이를 뒤져 본다. 지난번 내가 잠시 맡겨놓은 우산이 아니더라도, 어떤 우산이든 손에 걸리기만 하면 쾌재를 부른다.
"내가 이럴 줄 알고 우산을 여기다 맡겨 뒸지.."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어떤 날은 내가 숨겨둔 우산하고 좀 다른 경우도 있다. 그래도 우산이다.
제주시내의 야경을 볼 수 있는 행운
오후 늦게까지 강의가 있는 날이나 공부를 한다고 도서관에 있다가 늦게 귀가하는 날이 있다. 학교 앞 정류장이 중간 정류장이고, 좌석도 몇 안 되는 마이크로버스라 보통은 빈 좌석이 없다. 직장인들의 퇴근시간과 겹치거나 막차시간이 다가오면 더욱 그렇다. 할 수 없이 서귀포까지 40여분을 서서 가야 한다. 다음 버스를 기다려도 마찬가지 이기 때문에 차리리 가는 게 낫다. 좁은 버스 안 사람들 사이에 끼여서 서서 가는 게 쉽지는 않다. 그래도 얼굴이 익숙한 동료들이 있기에 왁자지껄 떠들면서 가기에 지루하지는 않다.
한 10분여를 달리면 삼의악 오름이다. 지금의 제주의료원 뒤편 길이다. 고도가 높은 데다가, 당시에는 길가에 가로수가 없었기에 제주시내 야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밤 8~9시경 제주시내는 거의 점등이 된 상태라 볼만하다.
" 야, 제주시내 야경이네.. 멋있다. 저거 칼호텔.."
서서 가는 피로, 오늘 하루의 피곤함이 싹 풀리는 순간이다. 한강 이남에서 가장 높은 칼호텔이 우뚝 솟아있다. 개관한 지 얼마 안 된 21층 호텔이라 당시 모든 도민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언제 한번 꼭대기층 스카이라운지에 가보려나. 부푼 꿈을 안고 부러운 듯 쳐다보고 있노라면 버스는 이내 서귀포를 향해서 달리고 있다. 스카이라운지에서 차를 한잔 할 수 있는 행운은 그 앞에 있는 직장을 다니던 시절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성판악을 넘으면 미완성의 숲터널이 있었다.
성판악을 넘으면 바로 숲터널이 나온다. 인공이 아닌 자연의 나무들이 만들어 놓은 숲터널이다. 내가 통학을 하던 당시만 해도 나무들이 길을 완전히 덮지는 못했다. 가운데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당시 버스의 지붕에는 조그만 여닫이 문이 있었다, 에어콘이라는 게 없던 시절 더운 여름날에는 지붕에 있는 창문을 열 수 있었다. 차의 높이가 높지를 않았던 때라 손을 들고 창문을 열면 쉽게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나무들이 완전히 길을 덮었다. 하늘을 볼 수 없는 말그대로 숲 터널이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입구에는 숲터널이라는 입간판도 세워져 있다.
지금은 가끔 5.16 도로를 이용한다.
아주 부득이한 경우다. 5.16 도로 인근에서 출발을 해서 서귀포로 가는 경우다. 5.16 도로는 오더 드라이버가 운전하기에는 그리 편한 길은 아니다. 30년이 넘은 베테랑 운전자인 나도 가장 많이 신경이 쓰이는 길이다. 우선 급경사가 많고, 도로의 굴곡이 심하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아리랑 고개가 대부분이다. 성판악까지는 올라가고, 성판악에서는 내리막 길이다. 잠시도 방심을 하거나 창밖을 보면서 넋을 놓을 수 없는 길이다.
1960년대 만들어진 좁은 왕복 2차선 도로, 양옆에는 자연림이 우거진 곳이라 나름대로의 운치와 멋이 있다.
예전 버스에 몸을 싣고 달리던 시절하고 지금 직접 운전을 하고 달리는 길에서 느끼는 감정을 사뭇 다르다. 그러나 오랜 맛에 달려보는 길은 꿈 많던 그 시절로 나를 잠시 돌려준다.
내 고향의 올레 같은 포근함을 던져준다.
그 길에 잠시 잊었던 젊은 날의 꿈과 추억을 되돌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