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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영 Sep 12. 2023

어느 날 갑자기 우울증이 찾아왔다.

2주간의 야근 그리고 불면증... 후에 생각나는 나의 우울증 초기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맡아 2주간 야근+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리고... 어찌어찌 끝났다.


결과가 어떻든 일단 스트레스 덩어리 그 자체인 나는 모든 일을 이불과 함께 덮어버렸다.

드디어 끝이다. 글을 쓸 마음의 여유조차 없다는 게 이런 걸까?


처음 다짐했던 일주일 3개의 글쓰기는 자칫 나의 불면증을 유발하는 무리한 계획이었다. 글을 쓰는 게 너무 좋지만 가끔 무리한 계획은 글을 좋아하는 감정보다 숙제를 해내야 하는 작업으로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처럼 해야 했는데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문득 처음 우울증을 인지했던 날이 떠오른다.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들 또는 그 주변인들의 우울증을 이해하고, 납득하기 어려웠다. 당장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에게 그런 감정조차 사치라고 느꼈다. 알바를 하러 가기 전에 천 원짜리 토스트를 입에 욱여넣으며, 그런 사치란 내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울증이 그렇듯이... 아주 조금씩 조금씩 내 삶에 스며들었다. 처음 느낀 우울증은 생각보다 잔잔해서 크게 힘들지 않았다. 대학교 4학년 1학기 (조기졸업으로 사실상 막학기) 때였다. 언니의 취업으로 갑자기 집에 여유가 생겼다. 처음으로 방과 주방과 화장실이 있는 집을 월세로 살게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쥐꼬리만 한 집이었겠지만 고시원을 전전하던 우리에게는 궁궐 같은 집이었다. 첫날에는 너무 무서워서 안방에서 다 같이 손을 잡고 잤던 기억이 난다.


그 무렵이었다. 우울증이 시작된 건... 우울증은 사치병이라고 비난하던 나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우울증 걸린 먼 지인의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보통 우울증이 찾아오는 시기는 가장 힘들 때가 아닌 편안해졌을 때라는 것.


예를 들면 강도에 쫓길 때는 작은 상처들이 나도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해 아프지 않다가 강도가 잡히면 안도감으로 인해 다친 곳들이 아프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바로 나의 상황이었다. 그 무렵 평일 저녁과 주말 내내 하던 과외알바를 정리하고 학교에서 인턴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취업준비에 전념하라는 언니의 큰 배려였다.


고등학교 2학년부터 평일 주말 없이 한 달에 하루 쉴까 말까 한 삶을 보냈는데 10년 만에 갑작스럽게 생긴 주말이 낯설었다. 그리고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이 좋았지만 두려웠다. 이 시간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행복하다고 느껴질 무렵 나는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


아마도 내가 인지한 시간이 저 시간이었지 우울증은 나의 어린 시절부터 끈질기게 날 쫓아다니고 있었다. 살아야 한다는 몸부림에 나 자신을 돌보지 못해 모르고 있었던 것뿐이다.


당시에는 이 두려움이 단순히 취업으로 인한 스트레스라고 치부해 버리고 남는 시간을 더 치열하게 취업준비를 했다. 그렇게 여유시간이 없어지고, 바쁘게 살자 그 옅은 감정들은 사라졌다. 그렇게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워라밸이 좋은 회사에 입사했지만 불안했다. 시간적 여유가 생길 때마다 나를 짓누르는 불안감이 두려웠다. 첫 입사 후 4년 내내 고시공부를 병행한다며 내가 나를 괴롭혔다. 그러다 몸이 너무 안 좋아져 회사와 고시공부를 모두 내려놓았다. 다시 그 녀석이 찾아왔다.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주르륵 나왔다. 작은 소리에 예민해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해주는 조언도 걱정도 온몸을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져 들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몇 주간 이런 상태가 계속 됐다. 힘들다고 느껴질 무렵 재취업을 하게 되었고, 바빠지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처음 맡아보는 업무에 우울증은 더 심해졌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루에 2~3시간도 자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사람이 딱 미치기 일보직전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병원은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혼자 해결하려고 아등바등거렸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게 그 당시 나는 가장 행복할 때였다. 비혼주의였던 내가 결혼을 하고, 남들 다 가고 싶어 하는 회사에 취업이 되었다. 그런데 난... 내 인생에서는 가장 불행했다. 수학문제처럼 정해져 있는 답이 아니었다. 미로에 빠진 것 같았다. 나는 가장 행복한데 내가 가장 불행한 원인을 찾아야 했다. 알 수 없었다.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날 멀리서 지켜보던 언니가 차분히 말을 꺼냈다. (당시에는 말 거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한다. 당장 나쁜 일이라도 생길까 봐 조마조마해하면서 내 옆을 아무 말 없이 지켰다고 한다.) 언니의 친구 중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는 분이 있었다. 그분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며 병원에 가보자고 했다. 그 언니가 받은 상담 내용을 일부 빌리자면, 힘들었던 시간이 지나고 괜찮아졌을 무렵 돌보지 못했던 그때의 감정들이 지금의 나를 힘들게 하는 거라고 했다. 치열하게 살아온 나를 가장 옆에서 바라본 언니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를 떠올렸고, 함께 치료를 받자고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와 나는 그렇다.

잔인하고, 어둡던 그때의 우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우리 안에 숨어있다.

도망갈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다. 가난이... 폭력이... 그렇다. 조금만 괜찮아져도 그 꼴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경제적으로든 심적으로든 여유가 생기면 또다시 다른 형태로 괴롭힌다.




언니와 남편의 권유에도 나는 병원을 가지 않았다.

그 무렵 날 힘들게 하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운동을 시작했다. 별 거 없었다. 그냥 동네를 2시간씩 매일 걷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와 그리고 어린 시절의 나.


나는 어른스러운 척하는 아이였다.

가난을 숨기기 위해 어른인 척할 뿐이었는데....

그런데 서른 살이 훨씬 넘은 나는 아직도 어른스러운 척하는 아이로 남아있다.

제대로 경험하면서 성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면의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는 이 아이를 어떻게 어른으로 만들어줘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직 나에게 뾰족한 방법은 없지만... 이 아이와 더 친해져 보려고 한다.

아무도 다독여주지 못한 아이의 마음을, 어른스러움이 아닌 아이스러움을 찾을 수 있도록...

아이의 아이다움이 충족되어야 어른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그래서 가난한 집 아이들의 어른스러움이 너무 싫다.

그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내면의 아이는 성장하지 못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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