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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CCO Jun 08. 2024

경복궁 안에 있었던 군부대,
'30경비단' 이야기

12.12 군사 반란의 배경이었던 '30경비단'

2023년 말에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 천만 관객 돌파라는 기록적인 흥행으로 인해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12.12 군사 반란'이 자연스럽게 재조명되었다. 반란의 주체였던 하나회부터 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생긴 희생자들의 이야기까지. 그런데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려고 한다. 반란군의 본부로 활용되었던 곳이 바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가유산 중 하나인 경복궁의 내부에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12. 12 군사 반란 당시 반란군의 본부로 활용이 되었던 곳. 경회루 북쪽이자 지금의 태원전 영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30경비단'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길 수 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경복궁 안에 군부대가 있었던 걸까?' 그 시작을 알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앞서 짤막하게 언급했던 것처럼, 30경비단이 있던 경회루 북쪽에는 조선시대 당시 임금의 어진을 모신 태원전과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시신을 잠시 모시는 빈전이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였던 1915년, 일제가 경복궁에 조선물산공진회를 열기 위해 태원전과 빈전 일대를 허물어버린다. 


경복궁 태원전 (C) 궁능유적본부


그리고 그 자리에는 조선총독부와 총독 관저를 경호하는 일본군 부대가 들어서게 된다. 그때부터 경회루 북쪽 영역은 군사지역으로 활용되기 시작한다.


조선총독부 (C) WIKIMEDIA COMMONS


해방이 되고 일본군의 철수 이후에도 경회루 북쪽 영역은 미군정 시기에 미군 부대가 주둔하는 등, 여전히 군사지역으로 활용이 되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1961년에 일어난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이곳에는 또 한 번의 변화가 일어난다. 5.16 당시 30사단 소속 1개 대대를 정변 세력을 보호하기 위한 친위대로 지정하여 경복궁에 주둔시킨 것이다. 시작은 '30경비대대'였다. 하지만 이후에 부대가 확장이 되어 '30경비단'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5.16 군사정변 (C) WIKIMEDIA COMMONS


30경비단의 주 임무는 밤마다 무장 병력이 경복궁을 순찰하는 등, 대통령이 있었던 청와대 일대를 경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통치 권력 최근접 방어'라는 부대 특성상 전차와 장갑차까지 갖출 뿐만 아니라 각 군부대와의 통신연락망까지 구축되어 있었다.


이러한 부대 특성과 당시 30경비단장이었던 장세동 대령이 전두환과 노태우를 필두로 한 군내 사조직 '하나회' 소속이었던 점이 맞물려, 1979년 하나회가 일으킨 12.12 군사 반란 당시 30경비단은 반란군의 지휘소 역할을 하게 된다.


12.12 군사 반란 당시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 (C) 더중앙플러스


하지만 1993년에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의 경복궁 복원 계획에 따라 30경비단은 1996년, 경복궁에서 완전 철수를 하게 된다. 그렇게 복원 공사가 이루어지게 되고, 2005년이 되어서 그 자리에는 기존에 있었던 태원전이 복원되어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경복궁 태원전 (C) 궁능유적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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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CCO 예코 콘텐츠기획팀 양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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