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a Jan 31. 2024

편지 열하나,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속 토마토-



 



“니는 이 엄마를 어떻게 하면 괴롭힐까 하고 있제?”


 

위트릴로,

또 시작되었구나, 속으로 뇌까리며 설거지를 했습니다. 커피를 타주면 머리까지 숙이며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어머니, 침대에 누운 어머니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면 “나는?”하며 입술을 쭉 내미는 어머니, 그리고 지금의 어머니. 어떤 것이 참모습일까요? 선택하라면, 선택할 수 있다면, 두 말도 하지 않고 지금이 아닌 모습을 가리키겠습니다.


 

어머니는 바나나 껍질을 휴지통에 그냥 버리듯이 오늘도 그랬지요. 갈치를 뼈를 발라 먹고 남은 것들을 휴지로 싸서 버리셨습니다. 또 늘 그렇듯이 일부러 뒤져서 음식물 쓰레기 쪽으로 옮겨 놓으며 나는 그러지 말라고 했지요. 그래도 된다, 구운 갈치라서 냄새도 안 난다, 내가 혼자 살아야지 이렇게 살아서 뭣 하나 그런 넋두리가 쏟아졌습니다. 그 말들은 얼마나 예리하게 저를 찔러댔던지요. 십 대 때부터 들어오던 저 말은 이제 더 이상 심장을 파고들지 않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평균 대여섯 시간을 넘기던 어머니의 악다구니도 힘을 잃은 게 틀림없습니다. 저 말뿐, 어머니는 더 이상 악을 피우지는 않았습니다.


 

나흘 전에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보았습니다. ‘토마토’는 내게 트라우마입니다. 싱싱하고 몸에 좋은 토마토는 제게 악몽과도 같습니다. 이십여 년 전, 어머니는 새벽마다 믹서기를 돌려서 간 토마토를 제 앞에 내밀었습니다. 눈을 뜨자마자 무조건 마셔야 했지요. 뭔가 속에 부대끼고 맛도 없어서 절대 안 먹고 싶은 날에도 어림없었습니다. 하기 싫은 학습지를 꾸역꾸역하는 것처럼 마셔야 했지요. 안 먹겠다며 버텨보았지만, 통하지 않았습니다. 안 먹고 간 날에는 난리가 났었지요. 악다구니는 도를 넘고, 어머니의 잔소리 속에서 나는 악독한 년이 되고 말았지요. 어머니는 늘 나를 넘어뜨리며 이겨왔고, 내 등을 짓밟고 승리의 깃발을 펄럭였습니다. 등을 꿈틀거리며 일어설 기색이라도 보이면, 뾰족하고 날카로운 깃대 끝으로 나를 찔러댔지요. 그러니, ‘토마토’라면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을 정도입니다. 항암 효과가 있을 정도로 몸에 좋은 그것이 내게는 상처 그 자체였지요.


 

어제, 잠깐 잤던 낮잠에서 갑자기 그 토마토가 나왔습니다. 당구공같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세모 대열을 짓다가 네모 모형으로 바뀌기도 했지요. 하나같이 빨갛게 잘 익은 탐스러운 토마토였습니다. 토마토는 더 이상 저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라 이 말이 맞을 테지요. ‘나는 이제 더는 토마토를 보고 아파하지 않습니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영화를 제게 추천해준 이를 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마도 어디선가 자극을 받아서 봐야 할 영화 목록에 올려둔 게 분명합니다. 1987년, 패니 플래그(Fannie Flagg)의 소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각색해서 만든 존 애브넷(Jonathan Michael Avnet) 감독의 1992년 영화입니다.

미국 앨라배마의 한 마을, 물에 빠진 트럭을 건져내는 것이 첫 장면입니다.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숙모를 만나기 위해 남편과 가던 에블린(Evelyn)은 잠시 정차한 차 안에서 초콜릿 바를 먹으면서 이상한 소리를 듣습니다.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기차 소리이지요. 메뉴가 가득 적힌 낡디 낡은 무인 카페의 유리창 안에서 화덕의 불빛이 어리는 것을 봅니다. 이 장면이야말로 영화의 핵심 주제가 함축되어 있지요.

정작 만나려던 숙모는 에블린을 쫓아내는 바람에 그녀는 니니(Ninny)를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니니한테서 휘슬 카페에 얽힌 얘기를 듣게 되지요. 에블린은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억지를 내어 중년여성 클리닉에 다니기도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늙었다고 생각하기에는 젊은 나이, 젊다고 여기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인 에블린. 텔레비전의 스포츠 중계만 집중하며 에블린한테는 무관심한 남편. 그녀는 초콜릿으로 영혼의 허기를 면하려 하지만, 그것마저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격입니다.


 

니니(잇지)는 사랑했고, 사랑을 외면했고, 사랑을 되찾았고, 사랑을 지켜냈고,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니니 인생이었지요. 사내아이처럼 입고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보이쉬한 소녀였던 니니. 그녀를 유일하게 이해해줬던 다정한 오빠 버디는 기차 사고로 죽게 됩니다. 그 오빠가 좋아했던 루스(Ruth)는 집에서 정해준 대로 프랭크와 결혼하게 되지요. 잇지는 가정폭력 범죄자인 프랭크에게서 임신한 루스를 구해내지요. 카페를 열어서 갓 낳은 아이와 흑인인 십시와 빅 조지와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갓난아이를 훔쳐 가려고 하는 프랭크에 맞서서 십시는 프라이팬을 휘두르게 되고, 프랭크는 즉사합니다. 그게 1933년 9월 30일에 벌어진 일이었지요.

루스는 자신이 낳은 아들을 ‘버디’라고 했지요. 암에 걸린 루스는 잇지한테 버디가 꼭 대학에 가도록 도와달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그리고 사랑했던 연인 버디가 기차 사고로 죽기 전에 들려준 그 얘기를 다시 들려달라고 하지요.


 

“가을에 오리 떼가 호수에 몰려 왔어. 그때 일이 벌어진 거지.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더니 호수가 얼어버렸어. 정말 순식간이었지. 오리들은 얼음을 매달고 날아가 버렸어. 이제 그 호수는 조지아 주 어딘가에 있어.” 

창가에서 깊은 우정을 나눈 잇지의 이야기 속에서 버디를 만나면서, 루스는 눈을 감습니다. 예전에 버디가 그랬던 것처럼 작은 버디도 친구들과 놀다가 기차 사고로 왼쪽 팔을 잃게 되지요. 두 팔이 있는 친구처럼 야구를 할 수 없다며 시무룩해하는 버디한테 잇지는 다가가서 얘기하지요.


수많은 조개 중에 하나님이 그 하나에 모래를 넣어서 진주를 만들었다고. 슬퍼하거나 창피해하지 않은 세 발 달린 강아지처럼 똑똑하고 당당해지라고. 

잇지는 말합니다. 


“지금은 용기를 가져야 할 때야!”



화사한 맑은 오래 전 어느 날, 루스와 잇지는 소풍을 간 적이 있었지요. 그 당시 루스는 잇지 엄마의 부탁으로 루스를 교회 안에서 교화시키려는 사명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비뚤어지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있던 잇지는 집 안의 골칫덩어리였으니까요. 잇지는 나무에 매달린 벌꿀 통에 손을 넣어서 꿀을 꺼내어 루스한테 건넸지요. 무수한 벌들이 달라붙는 데도 잇지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방금 전까지는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꿀벌들이 널 좋아하나 봐. 꿀벌들의 연인씨!”

루스는 이후로 잇지를 ‘꿀벌들의 연인씨’라는 애칭으로 불러주곤 했습니다. 무섭거나 두려워서 피하지 않는 것, 그 당당함이 잇지를 살아가게 했습니다.


 

니니의 삶을 듣는 동안 에블린한테 변화가 찾아옵니다. 에블린은 순종에서 반항으로, 분노에서 새로움으로 자신의 삶을 가다듬게 되지요. 에블린은 니니의 손을 잡고 함께 집으로 옵니다. 니니가 눈을 감는 순간에 어쩌면 에블린도 호수를 떼어 매고 날아간 오리 얘기를 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으로 당당하라. 그 어떠한 비난과 질타가 오더라도. 




올해가 시작될 때 하나님이 제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외모만 치중하지 말고 내면을 바라보라고 간곡하게 말하니, 화를 내며 그 말이 자신한테 상처가 된다고 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지독한 혼란 속에 파묻혀 있기에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며 돕고자 했지만, 왜 강요하냐고 그렇게 하니 답답하다고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영혼의 빰을 맞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일까요? 아무런 손을 내밀지도 말아야 할까요?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는 내 말에 씨익 크게 웃어주고 있습니다. 당당함은 죄가 아니야, 그것이 사랑이라면!



위트릴로,

그러니 내민 손을 거부했다고 화내지 않고, 위축되지 말고 다만 당당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라는 내면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영화는 여지없이 이야기의 힘을 드러냅니다. 죽는 순간까지 이야기를 듣고, 노래하고, 말하고, 쓰겠습니다. 아침마다 뜨는 토마토별로 어머니가 떠나실 때도 지금도, 그때도 여전히 당당하겠습니다.


   

-2023. 6. 5. 시아-
    





 * 이 편지는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을 극복하고 만성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해방한 모리스 위트릴로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경계성 인격장애’인 구순이 넘은 제 어머니와 연관되어 치유와 관련한 체험을 공감해줄 위트릴로한테 띄우는 간곡한 글입니다. * 


작가의 이전글 편지 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