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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a Jan 31. 2024

편지 열다섯,

-소설 '소나기' 밖에서 '나기'를 만나다-




위트릴로,

이번 달까지 발간해야 하는 책이 있어서요. 제목은 ‘회복탄력성 증진을 위한 삶의 지침서’입니다. 책 속의 내용 중, 함께 나누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그대로 인용해 봅니다. 



***************************************************** 


 상실은 잃어버리거나 사라지는 것이다. 상실과 연관된 다양한 대상이 있을 것이다. 크게 범주를 나누면, 자신과 관련된 대상이거나 바로 자신이다. 자신과 관련된 대상은 사람, 자연, 사물 정도이고 자신이라면 기억, 정신, 자격, 권리, 사회적 위치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대상을 포함해서 상실 전의 관계를 ‘친밀’로 설명할 수 있다면, 상실한 이후에는 관계는 ‘차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이 자신이어도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어 인지력이 뛰어난 누군가가 치매 진단을 받게 되고, 기억력이 ‘상실’되어 가는 경우라고 해보자. 치매가 오기 전의 그는 기억과 ‘친밀도’가 높았다. 병이 진행될수록 기억과 ‘차단’되어 가고 있다. 또 다른 예로, 반려식물과 친밀하게 지내던 이가 있었다고 치자. 어느 날 키우던 식물이 죽어버렸다면, 그는 부득이하게도 그 식물과 ‘친밀’했던 과거와 달리 관계가 ‘차단’되고 만 것이다. 


 

 상실하게 된 다음 느껴지는 감정 상태는 ‘상실감’이다. 상실감은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미묘하다. 슬픈가 하면 안타깝고, 우울한가 하면 죄책감이 들고, 그리운가 하면 상실한 상황이 거짓말 같기만 하고, 화가 나는가 하면 가슴이 시리고 무너질 정도로 아프기도 하다. 상실감은 ‘친밀’했던 만큼 크게 올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특히 사랑한 이를 상실했을 때, 극도의 상실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여기,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의 주인공 소년이 있다. 먼저, 줄거리를 살펴보자. 


 

소년은 마을에 있는 개울가에서 또래인 소녀를 처음으로 만난다. 먼발치에서 오로지 바라만 볼 뿐이다. 어느 날, 소녀가 소년에게 조약돌을 던지고, 소년은 그것을 소중히 간직한다. 소년은 소녀의 제안으로 산 너머로 간다. 들판과 산을 지나가면서 둘은 가까워진다. 하산하는 길에 소나기가 내렸고, 둘은 수숫단 속에서 비를 피한다. 비가 그친 다음 도랑물이 불어서 소년은 소녀를 업고 도랑을 건넌다. 그 이후 소년은 소녀를 기다렸으나 소녀는 한동안 보이지 않는다. 오랜만에 우연히 만난 소녀는 옷에 진 얼룩을 보이며, 소나기 오는 날, 등에 업히면서 들었던 얼룩이라고 말한다. 그 말에 소년은 부끄러워한다. 소녀는 그동안 아팠으며, 곧 이사하게 되었다는 말을 남긴다. 소년은 이사 가기 전, 소녀를 한 번이라도 만나면 주려고 호두 서리를 한다. 소녀가 이사 가기로 한 전날 밤, 잠결에 부모가 나누는 대화를 듣는다. 소년과 추억이 담긴 옷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는 말을 남기며 소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설은 이렇게 마무리되었지만, 이제 이 소설의 주인공 소년을 만날 차례다. 소년의 이름을 ‘나기’라고 하자. 나기는 13살, 초등학교 6학년이다. 나기네가 사는 곳은 전라도 구이의 시골 마을이다. 나기의 부모님은 대를 이어 농사를 짓고 있다. 나기의 부모님이 심상 시치료 센터를 찾아온 것은 나기가 하는 문제 행동 때문이었다. 

 나기는 빠짐없이 학교 출석을 잘하는 성실한 아이였다. 친한 친구는 두셋 정도 있었고, 싸우거나 말썽을 부린 적도 없다. 갑자기 최근에 학교에 무단결석을 계속하고 있으며, 금일까지 벌써 열흘째 연달아 결석 중이었다. 가족들과 대화하지 않으려고 하며 자신의 방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아예 방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 하고 외출도 전혀 하지 않았다. 

 집안에서나마 방에서 나오도록 식탁으로 불러내려고 갖은 애를 써도 소용없었다. 할 수 없이 부모는 끼니마다 나기의 방문 앞에 식사를 차려 갖다 놓았다. 그렇게 차려준 밥도 거의 먹지 않아서 첫 사흘간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지금은 평상시 먹던 양의 삼 분의 일 정도의 양으로 겨우 두 끼 정도만 먹고 있었다. 부모는 나기의 이런 행동에 대해 전혀 짐작 가는 것이 없어서 많이 당황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사춘기로 인한 불안정한 정서 때문일 거라고만 생각하다가 행동이 점점 심해지자 학교에 이러한 상황을 알렸다고 한다. 학교 측은 혹시 나기가 학교폭력에 휘말린 사실이 있는지 조사까지 했으나 별다른 상황이 없더라는 얘기를 해왔다고 했다. 나기의 부모님은 나기가 학교 출석, 식사하기, 대인관계 등 일상생활이 원활하게 이뤄지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으로 심상 시치료 센터를 방문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기의 형제는 없으며, 부모는 나기가 비교적 평탄하게 잘 자라왔으나, 생후 일 개월 무렵 모친의 건강 악화로 두 달간 친척 집에 맡긴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나기는 특별한 반응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보름 전 텔레비전을 함께 보다가 주인공이 불치병에 걸려 죽는 장면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엄마도 죽을 뻔했는데, 살아났잖아! 나 낳고 얼마 안 있어서 말야.” 이 말이 어머니는 마음에 가시가 박히듯 걸린다고 했다.     

 * 나기의 초기상담


 나기는 부모의 적극 권유로 어머니와 함께 심상 시치료 센터에 방문하였으며, 고개를 숙인 채 치료사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어머니는 개인 치료실 밖 대기실에서 기다리도록 하고, 나기하고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치료사: 안녕? 나기야. 나는 심상 시치료사 시아야. 만나서 반가워! 

-나기:(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시아: 이렇게 오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겠구나. 그래도 이렇게 찾아와줘서 정말 고마워! 

-나기:(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이며,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시아: 부모님이 걱정하고 계시는 것, 혹시 알고 있니? 평소의 나기와 많이 다른 모습 때문에 말이야.  

-나기:(대답하지 않으며, 고개를 더 아래로 내리고 있다.) 

-시아: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얼마나 힘들면 그렇게 성실하게 다녔던 학교를 가지 않을까? 게다가 밥도 잘 먹지 않고 말이야. 그 어떤 것이 나기를 이토록 힘들게 하는 걸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면, 지금 여기서 말해줄 수 있을까?  

-나기:(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로 힘 없이 젓는다.) 

-시아: 그렇구나.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구나. 혹시, 그게 ‘죽음’과 연관된 일인 거니?  

-나기:(갑자기 고개를 들고 치료사를 쳐다보다 다시 숙인다.) 

-시아: 나기가 말해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 나는 마법사가 아니니까. 그렇지만 최근에 어머니한테 들은 나기의 모습에서 마음을 나눴던 어떤 대상과 헤어진 아픔이 느껴지는구나.  

-나기:(고개를 약간 들지만,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입술을 깨물고 있다)  

-시아: 만약, ‘죽음’이라면 선생님이 얘기해줄 것이 참 많단다. 선생님은 오랫동안 죽음이 궁금해서 연구를 많이 했거든. 죽음 이후의 세상, 그리고 죽고 나서의 삶에 대해서도 말이야. 

-나기:(갑자기 고개를 들며, 치료사의 눈을 바라보며) 네? 죽음 이후의 세상도, 삶도 있다고요? 

-시아: 그럼, 물론이지. 죽음은 사실, 허구야, 눈에 보이는 것은 죽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그대로 살아있어. 

-나기:(치료사의 눈을 똑바로, 약간 공격적으로 바라보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죽으면 끝이잖아요! 

-시아: 보이는 것은 그렇지. 생각해 보렴.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어. 보이는 존재인 육체는 죽으면 사라지지.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인 영혼은 원래 보이지 않았기에 사라질 리가 없어. 처음부터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야. 그리고 ‘에너지보존의 법칙’이라고 배운 적 있지? 에너지가 다른 에너지로 전환될 때, 전환 전후의 에너지 총합은 항상 일정하게 보존된다는 법칙 말이야. 영혼의 에너지는 항상 그렇게 보존될 수밖에 없지. 영혼은 에너지의 존재이니까!  

-나기: 그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건가요? 아니면 선생님의 일방적인 생각인가요? 

-시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사람들이 있어. ‘임사 체험자’라고 하지. 죽음의 세계로 갔다가 돌아오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야. ‘국제임사체험연구회’도 있을 정도로 학문적으로 계속해서 연구하고 있지. 1975년에 레이몬드 무디라는 심리학 교수가 ‘삶 이후의 삶’이라는 책을 냈고, 1991년에 정신과 의사 퀴블러 로스는 ‘사후생’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어. 그 책에 이런 말이 있단다. “죽음이란 나비가 고치는 벗어던지는 것처럼 단지 육체를 벗어나는 것에 불과하다. 죽음은 당신이 계속해서 성숙할 수 있는 더 높은 의식 상태로의 변화일 뿐이다.” 

-나기: 그럼, 수나가 죽지 않았다는 거예요?  

-시아: 육체는 사라졌지만, 영혼은 그대로라는 뜻이야. 이건 논리적이고 과학적이지만, 3차원적으로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해. 수나는 4차원 이상으로 간 것이니까! 

-나기: 수나가 어디에선가 살아있다는 말이지요? 참, 수나는 제 친구예요. 수나가 죽은 지, 아니, 육체만 죽은 지 열흘째 되었어요.  

-시아: 아, 그렇구나. 수나를 말해줘서 고마워. 나기가 정말 많이 힘들었구나. 수나의 육체가 사라져서. 그만큼 수나와 친했구나! 

-나기: 수나는 개울가에 혼자 앉아 있었어요. 내가 주로 앉아서 노는 징검다리 위에서요. 내가 특히 좋아하는 돌은 학교 쪽에서 건너오면 다섯 번째 놓인 약간 분홍빛을 띤 돌이거든요. 하필이면, 그 돌 위에 앉아 있는 거예요. 비키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죠.  

-시아: 나기가 좋아하는 돌 위에 앉아 있는 수나를 본 것이 첫 만남이었구나.  

-나기: 네, 수나가 자꾸만 물을 움켜잡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물고기를 잡고 있나 했더니, 그게 아니라 물을 움켜잡고 있더군요. 참, 어리석다 하고 생각했지요. 물은 움켜잡을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이상한 아이다, 속으로 그랬지요.  

-시아: 그랬구나.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친해진 거니? 

-나기: 그렇게 징검다리에 앉아 있는 수나와 몇 번을 마주쳤어요. 다섯 번째 되던 날, 수나가 산 너머로 가보자고 했어요. 저래 보여도 좀 멀다고 제가 말했지만, 은근히 모험을 즐기고 싶더라고요. 그때, 정말 신났어요. 안 갔더라면 후회될 만큼요! 무를 뽑아서 먹기도 하고, 소를 타기도 했지요. 마타리꽃으로 우산을 만들어 쓰기도 했어요. 수나는 웃을 때 왼쪽 뺨에 보조개가 있어요.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얼굴이 빨개진다.)  

-시아: 우와! 정말, 환상적인 멋진 날이었구나! 

-나기: 소를 타고 있는데 소임자 아저씨가 다가왔어요. 야단맞을까 봐 겁이 났지요. 그런데 나무라지 않고 소나기가 올 것 같으니 얼른 집에 가라고 이르시더군요. 곧장 집으로 가는데 비가 내렸어요. 엄청나게요! 그래서 수숫단 쌓아놓은 곳으로 갔지요. 그곳에서 비를 피했어요.  

-시아: 저런, 그랬구나. 비는 금방 그쳤을까?  

-나기: 한동안 시원하게 내리다가 그쳤어요. 한 이십 분만에요. 좁은 곳에 함께 있느라 제가 꺾어준 꽃들이 죄다 부러졌지만, 수나는 괜찮다고 했어요. 도랑물이 너무 많이 불어나서 수나를 등에 업고 건넜어요. 그때, 제 옷에 묻은 더러운 얼룩이 수나 옷에 묻은 것 같아요. 나중에 수나가 얼룩이 묻은 분홍 옷을 보여주었거든요.(다시, 얼굴이 빨개진다.) 

-시아: 그랬구나. 그래도 무사히 개울을 건너서 집까지 도착해서 다행이야. 수나는 혹시, 같은 학교에 다녔니? 

-나기: 수나는 할아버지 댁에 요양하러 온 거라고 했어요. 원래는 서울에 학교를 다니다가 전학 왔어요. 전학 온 첫날에 저를 만났던 거였어요. 그렇게 수나와 놀러 간 날, 선생님. 그날은 결코 멋진 날이 아니에요! 환상적인 날도 아니고요! 

-시아: 어떤 일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거니?  

-나기: 그날, 비를 맞은 것 때문에 수나는 병이 도져서 죽게 된 거예요. (고개를 숙이며) 내가 그런 거예요. 내가 수나를 죽게 했어요.  

-시아: 아, 그날 이후 수나가 원래 있었던 병이 더 심해진 거였구나.  

-나기: 맞아요. 그러니까, 내가 수나를 죽게 만든 거예요. 

-시아: 그런 생각을 했으니, 너무나 많이 힘들었겠구나. 수나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기억나니? 그게 언제였는지? 

-나기: 네. 수나가 죽기 열흘 전이었어요. 오랜만에 개울로 나왔더군요.  

-시아: 수나가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나니? 

-나기: 이사를 간댔어요. 그리고 분홍 웃옷 얼룩을 보여줬어요. 소나기 오던 날, 등에 업힐 때 나한테서 묻은 거라고.  

-시아: 수나의 표정은? 어땠니? 

-나기: 표정을 잘 보지 못했어요. 그 말을 했을 때 제가 고개를 푹 숙였거든요. 너무 부끄러웠어요. 내 등에서 안 좋은 것이 옮겨갔구나 싶어서... 아, 표정은 잘 보지 못했는데 알 것 같아요. 수나가 웃었어요. 그날, 너무 재미있었다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많이 웃어본 날이라고 했어요.  

-시아: 그랬구나. 수나가 웃었구나.  

-나기: 그 웃음요. 혹시 가짜가 아닐까요? 나를 달래려고... 

-시아: 나기는 혹시 가짜로 수나를 만났니? 늘 진짜가 아니었니? 

-나기: 진짜였어요. 수나는 제 첫 여자친구란 말에요. 어떻게 가짜로 만나겠어요? 

-시아: 그럼, 수나도 진짜로 말했겠구나. 그리고 진짜로 웃었고! 

-나기:(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맞아요. 진짜 웃었어요. 그렇지만 나 때문에... 

-시아: 소나기를 맞고 나서 병이 악화되어 죽어서 모든 것이 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구나. 그래서 수나에 대한 죄책감이 많이 들었겠구나. 

-나기: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줬는데, 선생님은 바로 맞추셨네요. 죽음도요! 

-시아: 다행이야. 나기가 이렇게 나와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어서 감사하구나! 수나한테 직접 나기 때문에 죽은 것인지 물어봤으면 좋겠구나.  

-나기: 에~ 그걸 어떻게 물어봐요? 수나는 이 세상에 없는데. 

-시아: 당연히 물어볼 수 있지. 수나는 영혼으로 살아있으니까! 수나의 영혼을 만나서 물어보고, 그 답을 들으면 되니까! 

-나기: 그것, 사기 아니에요?  

-시아: 내가 사기 칠 사람으로 보이니? 나는 문학치료학 박사란다.  

-나기: 아! 그렇구나. 아니에요. 사기 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요! 죄송해요.  

-시아: 그럼, 잠시 눈을 감아볼까? 깊고 길게 호흡을 해볼 거야. 가슴이 아니라 배로 호흡을 할 텐데, 아주 쉽단다.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 해보렴. 입으로 길게 후~하고 내쉬면 된단다. 그다음에는 코로 충분히 들이마시면 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으로 소리가 약간 날만큼 후~하고 내쉬고 코로 들이마시고. 아주 잘 하는구나. 배가 움직이는지 확인해볼까? 배에 양손을 올려보자. 옳지! 그렇게 하면 돼! 아주 잘하고 있어. 천천히 들이마시고, 후~ 길게 내쉬고. 배가 움직이는 게 느껴지니? 그래. 자, 이렇게 열 번만 같이 해보자. (열 번 복식호흡을 한 다음) 

 자, 이제는 양손은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놓으면 돼. 내가 세 번을 세면, 수나 이름을 마음속으로 세 번을 불러보렴. 그러면 수나가 나타날 거야. 수나한테 하고 싶은 말을 얼마든지 물어보렴. 그러면 수나가 뭐라고 답해줄 거야. 자, 이제 세 번을 셀 거야. 하나, 둘, 셋! 수나 이름을 부를 차례야! 

 (잠시 3초 뒤에) 지금 수나가 나타났구나. 수나 모습을 보렴. 옷차림은 어떠니? 머리 스타일은? 얼굴 표정은? 자, 이제 수나한테 하고 싶은 말을 하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면 된단다. (3분 정도 뒤) 자, 이제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해. 수나와 대화가 끝났다면, 고개를 한번 끄덕여다오. 

 (나기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이제, 다시 세 번을 세면, 눈을 뜨고 지금, 현재, 이 순간으로 돌아오면 된단다. 내가 세 번을 셀 거야. 하나, 둘, 셋! 눈을 떠보렴. 

-나기: (눈물을 닦으며) 신기해요. 수나가 나타났어요! 수나는 분홍스웨터에 남색 치마를 입고 있었어요. 저랑 산 너머에 놀러 갔을 때의 그 차림이었지요. 제가 알던 모습 그대로예요. 하나도 변한 게 없었어요. 단발머리를 하고 나타나 환하게 웃고 있었어요. 내 탓이 아니라고 했어요. 아무 염려 말라고, 잘 지내고 있다고 했어요. 그곳이 어디냐고 하니 엄마가 있는 곳이라고 했어요. 지금 지상에 있는 엄마는 새엄마래요. 원래 엄마는 자신을 낳다가 돌아가셨는데, 얼굴도 모르고 자랐지만, 엄마를 보자마자 알았대요. 그 엄마를 만나서 너무나 즐겁게 지내고 있대요! 선생님. 저 소원이 있어요. 수나를 만나는 것, 또 할 수 있을까요?  

-시아: 그럼, 또 할 수 있지. 얼마든지 말이야. 그러려면, 지켜야 할 것이 있어.  

-나기: 학교 가는 것요? 밥 잘 먹는 것하고요. 할 수 있어요. 내일 당장이라도요. 엄마가 그러는데 여기 선생님한테 프로그램을 받아야 한대요. 그래도 되는 것 맞죠? 

-시아: 내가 할 말을 나기가 다 하다니! 대단하구나. 나기는 너무나 감수성이 뛰어나구나. 어머니한테 자랑해야겠다! 그래. 나하고 열두 번만 만나면 된단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열두 번 만나면서 함께 수나도 만나보자. 

-나기: 감사해요. 선생님. 참, 수나가 당부했어요. 학교 잘 다니고, 밥 잘 먹고 많이 웃으면서 지내라고. 선생님 말이 맞았어요. 영혼은 사라지지 않아요. 죽음은 가짜예요! 

-시아: 나기야. 이렇게 마음을 내줘서 고마워. 우리 나기, 너무나 잘했다. 다음 시간에 만나자! 



 


***** 나기의 초기상담에 대하여:

나기의 문제 행동은 극도의 상실감 때문이었다. 친밀한 관계를 ‘죽음’이라는 이유로 단절해야 했던 상황에 대한 갖가지 감정들이 휘몰아쳐 왔다. 그중에서 수나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죄책감’이 크게 작용했기에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상태였다.

본격적인 12회기 진행을 앞두고 심상 시치료의 심상(simsang; 인간 근원의 힘을 상징한 ‘마음의 빛’을 통해 영혼을 회복시킴.)기법을 활용해서 초기상담을 진행했으며, 이때 심상으로 수나와 만나 대화를 나눔으로써 현실 극복의 힘을 이룰 수 있었다.

이후 주어진 프로그램을 통해 나기는 상실의 위기를 극복하고, 보람 가득한 의미 있는 삶을 꾸려나갈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심상 시치료: 통합 예술 문화치유로 감성과 감수성으로 내면을 자극하여 궁극적으로 영혼을 성장시키는 새로운 심리치유로 2011년에 공식적으로 학계의 인정을 받았다.


  


-2023. 7. 25. 시아-







 * 이 편지는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을 극복하고 만성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해방한 모리스 위트릴로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경계성 인격장애’인 구순이 넘은 제 어머니와 연관되어 치유와 관련한 체험을 공감해줄 위트릴로한테 띄우는 간곡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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