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a Apr 14. 2024

[호모룩스 이야기-17]   복 많은 찬실이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만나다-

[호모룩스 이야기-17]      



                    복 많은 찬실이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만나다-               


 

                                                                                                  시아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 3악장 장송행진곡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목소리만 들려온다.



  “영화는 숫자가 아냐. 별 하나, 별 두 개도 아냐.”

  그리고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한데, 이어지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 부분이다.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지만, 미스터리하지는 않다.   


 

 ‘영화’라는 말 대신 몇몇 ‘꿈’을 넣어서 말해 보았다.      

  소설은, 시는, 책은

  숫자가 아냐.  별 하나, 별 두 개도 아냐. 


  사실은 숫자와 별이 많으면 기쁘다. 출판사를 비롯해서 환호성을 지를 이들이 많다. 그렇더라도 그래서는 될 일도 되지 않는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영화는 답을 말해주지 않는다. 교묘하게 꼬리를 감추고 이리저리 움직일 뿐이다.      



  영화 제작을 앞두고 지낸 기원제 뒤풀이에서 지 감독은 심장마비로 죽는다. 오랫동안 그와 콤비가 되었던 영화 프로듀서 찬실은 달동네로 이사한다. 스텝들이 이삿짐을 옮겨주고, 친했던 여배우 소피가 “이런 산 공기를 쐬고도 못 일어나면 언니는 사람도 아냐!”라고 하지만, 상황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다. 당장 한 푼이라도 벌어야 했던 찬실은 소피의 가사도우미로 일하게 된다. 그러다가 소피의 불어 가정교사인 김영이라는 단편영화 감독을 알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끌리는 마음을 드러내지만, 결과는 허탕이었다. 그런 찬실이 앞에 불현듯 속옷 차림의 ‘장국영’이라는 귀신이 나타난다. 주인집 할머니의 죽은 딸 방이 귀신의 터인 듯했지만, 마당이나 산책로에서 귀신을 만나곤 했다. 처음 귀신과 만났을 때 칠색 팔색하던 찬실은 어느덧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다시 영화를 할 수 있을지 물어보자 장국영은 지금 그 문제가 아닌 것 같다고 말을 돌린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게 문제죠.”

  그 말에 찬실은 진짜 자신에 대해 깊이깊이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렇지만 도대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급기야 김영한테 준 마음마저 헛된 꼴이 되자 모아놓은 영화 관련 자료들을 죄다 버리려고 한다. 그때, 장국영은 어두운 방에서 등을 돌린 채 앉아서 운다.      



  한편, 한글을 배우던 주인 할머니는 찬실이더러 시 쓰기 숙제를 도와달라고 한다. 찬실은 시는 어렵게 생각하면 더 어려우니 아무거나 써도 된다고 말해준다. 그 말에 힘입은 할머니가 이렇게 쓴다.      



  “사라도 꼬처러 다시 도라오며능 어마나 조케씀미까”     

  글을 본 찬실이는 나지막이 이렇게 말하기만 한다.       



  “어, 할머니. 이게 뭐예요.”

  할머니는 자신이 쓴 글을 소리 내어 읽는다.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며는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번에는 찬실이가 큰 소리로 엉엉거리며 운다. 그리고 내다 버리려고 한 영화 자료들을 다시 방으로 갖다 놓는다. 그걸 거들어주는 귀신, 장국영. 



  장국영은 한술 더 떠서 영화 ‘집시의 시간’을 연상시키는 아코디언을 들고 온다. 한번 메어보라는 장국영의 말에 싫다고 하면서도 얼떨결에 아코디언을 받아들고 ‘희망가’를 연주한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 같도다     



  찬실이는 비로소 속 마음을 꺼낸다.      

  “지금보다 훨싼 젊었을 때 저는 늘 목말랐던 것 같아요. 사랑은 몰라서 못 했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일만은 나를 꽉 채워줄 거라고 믿었어요. 근데 잘못 생각했어요. 채워도 채워도 그런 걸로는 갈증이 가시지 않더라고요. 목이 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에요. 저요.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

  이 말에 장국영은 멀리 우주에서 응원할 거라고 하며 작별인사를 한다.      



  그다음부터 찬실이의 에너지는 달라졌다. “이제 할 거 많아요.”라며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소피와 예전 스텝들과 김영까지 한꺼번에 찬실이 집에 찾아온 날, 갑자기 전구가 고장이 난다. 급기야 전구를 사러 아랫동네까지 줄지어 이동하는데 유독 크고 환한 달이 떠 있다.  “우리 꼭 같이 영화 만들어요. 그러면 진짜 좋겠다.” 이런 말을 도란도란 나누는데 찬실은 먼저 가라며 손전등을 비춰주겠다고 한다. 잠깐 멈춰선 찬실이 하늘을 보다가 숫제 눈까지 감으면서 또박또박 말한다.       



  “우리가 믿고 싶은 것. 우리가 하고 싶은 것, 우리가 보고 싶은 것.”

  그리고 영화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신비하다. 영화 필름들이 줄지어 늘어선 신기한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철길을 따라 터널을 막 벗어난 곳은 광활하기 그지없다. 땅과 하늘이 하나로 어우러진 끝도 없는 눈밭이 펼쳐져 있다. 하얗고 푸른 그 벌판 한 가운데 철길이 놓여있고, 그 길을 용케도 벗어나지 않고 달리고 있다. 영화관에서 유일하게 앉아있는 귀신, 장국영은 예의 그 속옷 차림이다. 그가 박수를 보내며 객석을 떠나자 징이 울리며 영화는 끝난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면서 흥에 겨운 노래가 흘러나온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 찬실이는 복도 많아 / 집도 없고 돈도 없고 / 찬실이는 복도 많네

찬실이는 복도 많지 / 찬실이는 복도 많아 / 남자도 없고 새끼도 없고 / 찬실이는 복도 많네

찬실이는 복도 많지 / 찬실이는 복도 많아 / 사랑도 가고 청춘도 가고

찬실이는 복도 많네 / 찬실이는 복도 많지 / 찬실이는 복도 많아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고 / 찬실이는 복도 많네 / 에헤이 에헤이야 어어라 우겨라     



  이렇게 영화는 끝이 났다. 여운이 너무나 감돌고 있어서 글을 쓰기 않고는 배기지 못할 정도였다. 봄날은 짧고, 청춘도 후딱 지나가고, 느닷없는 불운은 앞을 가로막는다. 뭐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것 없이 인생이 연기처럼 흩어지는 중이다. 도무지 인간의 일이란 종잡을 수가 없어서 다 된 밥에 재가 뿌려지는가 하면,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히기도 한다.      



  한때, ‘꿈’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견뎌낼 거라고 믿었다. ‘꿈’은 ‘자유’의 또 다른 말이라고도 여겼다. 현실을 극복할 유일한 길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꿈’이 욕망과 손을 잡는 경우가 다반사고, 그럴 때 ‘꿈’은 자유를 가장한 속박이라는 것을 안다. 누구에게나 ‘꿈’이 있어야 한다고 강변했던 어리석음을 내려놓는다. ‘꿈’은 자유가 아니라 ‘삶’이라고 고쳐 쓴다. 주어진 삶만큼 꿈을 품고 사는 것이다. 품다 보면 알에서 깨어나 날아오르게 될 것이다. 혹시 그렇지 않더라도 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할 것이다. 그것은 ‘숫자’가, ‘별의 개수’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행복은 보이는 물질이나 상황을 압도한다. 꿈을 품은 것은 자신이지만, 품게 한 이는 나보다 큰 존재다.      



  찬실이를 일깨워준 이는 장국영이라는 귀신이지만, 분석심리학자 융(Jung)의 시각으로 보자면, 영락없는 아니무스(animus)다. ‘아니무스’는 여성의 내면에 있는 남성성이다. 융은 인간이 이성에게 매혹이 된다는 것을 자신 안에 있는 다른 성의 성향이 투사된 것이라고 보았다. 즉, 남성은 내면의 여성성인 아니마(anima), 여성은 아니무스를 상대한테 던져놓고 상대방한테 끌리게 된다는 것이다. 찬실이가 김영한테 끌리는 마음이 외로움에 대한 궁여지책이었다면, 장국영의 제안으로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은 융 식으로 말하자면 ‘자기 개성화 과정’, ‘자기 실현화 과정’으로 들어선 것이다. 영혼의 중심, 마음의 빛을 찾아가는 삶은 그것 자체로 너무나 고귀하고 아름다워서 ‘복도 많지’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가진 게 없더라도, 불우한 것 투성이라도 그저 복도 많을 따름이다. 그 어떤 모습과 상황이라도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축복이다.      


  봄이 가고, 청춘도 가고, 인생도 간다. 이 말을 이렇게 고쳐 쓴다. 

  봄이 돌아오고 청춘도 돌아오고 인생도 돌아온다.

  어떻게? 도무지 알지 못하는 차원으로 이동하면, 모든 것은 돌아오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된다. 오로지 돌아오는 것이 자연스러울 따름이다, 꽃처럼. 그때가 되면, 오롯이 알게 되리라. 지금은 다만 꿈을 품으며 살아갈 뿐.            






    호모 룩스(HOMO LUX)는 빛으로서의 인간을 일컫습니다라틴어로 인간이라는 호모(HOMO)’와 빛인 룩스(LUX)’가 결합한 단어입니다     

  * ‘호모룩스 이야기는 치유와 결합한 시사와 심리예술과 문화에세이 이야기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호모룩스이야기16] AI가 심리상담을 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