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죽이면, 다시 솟아난다. 그게 마음의 놀라운 법칙이다. 그것은 인지적인 틀인 스키마(schma)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한번 이뤄진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은 어렵지만, 할 수 있다. 그럴 때 깊은 깨달음과 지혜가 다가온다. 철저하게 죽고, 다시 새롭게 빚어내는 것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고통 다음에는 성장이 일어난다. 그런 고통이 싫어서 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거만’이다. 인간이 얼마나 거만한가. 그 정도를 잘 나타낸 그림이 있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린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 장면은 이러하다. 인간 아담의 근육질 몸은 정면을 향해 있다. 오른쪽 팔을 대지에 짚고 왼쪽 다리는 세운 채 비스듬히 앉아있다. 이때 신이 천사를 대동하고 나타난다. 전력을 다해 아담하고 접속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아담은 그러거나 말거나 심드렁하다. 신 따위는 아무 관심이 없어 보인다. 육체를 한껏 과시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는 듯하다. 다만, 얼이 담긴 얼굴만은 다르다. 진지하게 신을 응시하며 신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그러니, 그림 속의 아담은 육체는 정면, 얼굴은 신이 있는 화면의 오른쪽을 향해 있다. 몸은 완고하다. 무릎 위에 세운 손가락은 좀처럼 치켜들지 않는다. 거만하기 이를 데 없다. 그게 인간이다. 신은 언제나 늘 간절하게 성장하기를 바라며 손을 내밀고 있다. 육체 속에 빠져서 몸만 믿으며, 보이는 것만 보면서 살아가는, 한 치 앞을 모르는 존재가 인간이다.
살면서 받은 가장 영예로운 것이 권사 직분이라고 여기는 어머니. 어머니는 삼십 년 동안 매일 같이 찬송가를 부르거나 성경책을 읽었다. 그러다가도 몸이 아프거나 컨디션이 나쁘면 대번에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이 계시면 나를 이 지경으로 놔두겠나? 다 소용없다! 이제 기도 안 할란다.”
그러다가 다시 회복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도하곤 했다. 그러면서 교회 가지 않는 아들이나 친척들을 싸잡아 욕했다. 신의 저주를 받게 된다는 거였다. 그게 반복되었다. 함부로 신을 들먹이고, 신을 내팽개치는 것이 어머니의 믿음이었지만, 그것 또한 거만이었다.
거만은 굳은 생각의 한계 속에서 갇혀있는 것을 의미한다. 내면의 성장을 멈추는 어리석음을 뜻한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무수한 이들이 피해자라는 생각에 갇혀있듯이 나도 그랬다. 가해자는 어머니, 피해자는 나. 이런 구도 속에서 살아왔다. 가해자와 같이 사는 삶은 지옥이었다. 내가 희생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뭔가 크게 손해 보는 것만 같았다. 오로지 참고 살아야 하는 어마어마한 십자가라고만 생각했다. 마음 안이 곪을 대로 곪아서 언제 터질지도 몰랐다. 이 고통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 몸부림쳤지만, 상황은 나를 더 옥죄어 왔다. 갇힌 생각에서 놓여났을 때, 내 마음이 죽었을 때, 비로소 거만의 껍질이 벗겨졌다. 다시 태어나는 기적이 그때 이뤄진 것이다.
시에서 인상 깊은 구절을 찾아보라고 하니 라가 ‘자아의 역사’라고 했다. 자아가 빙하기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하니, 선뜻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 구절이 맴돈다고 이상하다고 했다.
-자아는 중요한 게 아닌가요? 자아로 인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것 아닌가요?
자아가 없다면, 삶도 없을 것이다. 자아가 흔들린다면, 온전하게 살아갈 수도 없을 것이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자아의 중요성을 주장했지만,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은 달랐다. 자아(ego)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Self)가 있다고 본 것이다. 자아가 좋고 싫은 것, 취하고 버리는 것, 가치판단과 기준을 따른다면, 자기는 그 반대다. 가치판단과 기준을 초월한다. 자아가 3차원인 현실 세계에 충실한다면, 자기는 4차원 이상에 중점을 둔다. 인간의 마음이 원이라고 한다면, 원 바깥쪽의 경계선이 자아이고, 원의 중점인 가장 안쪽 핵심이 자기이다. 자아는 상황에 따라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하지만, 자기는 오로지 한 정점을 이룬다.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욕망을 실현하기를 꿈꾼다. 자아 확장을 원하기에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지만 자기는 우주의 에너지 또는 신과 접속을 꿈꾸기에 안으로 들어간다. 자기는 경계가 없는 상태, 무경계에 존재한다. 그래서 신 혹은 우주의 에너지와 함께 하는 것이 바로 자기이다. 학자나 현자에 따라서는 ‘자기’라는 명칭 대신 ‘큰 나’, ‘참 나’, ‘진정한 나’라고 하기도 한다. 상황에 휘둘려서 얼음 안에 갇혀있는 것이 자아라면, 처음부터 얼지도 않고, 심지어 얼음을 녹이려는 것이 자기이다. 자아는 지극히 3차원적인 시각에서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이라면, 자기는 하늘과 마음을 합치는 것이다.
자기는 고통을 죄다 겪고 나면, 분명히 이뤄질 내적 성장을 이미 알고 있다. 자기가 제대로 활약하기 시작하면, 자아는 방향을 바꾼다. 외부로 향해 뻗어 나가려는 욕망을 안으로 돌린다. 바로 자기를 향해 내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을 분석심리학자 융은 ‘자기 실현화 과정’이라고 했다. 자아실현이 아니라 자기실현! 그것은 평생에 걸쳐서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 독특한 개성을 깨닫고 펼쳐나갈 수 있다. 그래서 이 과정을 ‘자기 개성화 과정’이라고도 했다. 게다가 자아가 내면으로 방향을 트는 것을 ‘내향화’라고 했다. 인간은 누구나 내향화를 해야만 한다. 내향화를 해야만 제대로 아름다운 삶을 살아나갈 수 있다.
내향화는 에너지 방향이 안으로 뻗어있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오해한다. 내향화를 내성적인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묻혀 지내는 것을 좋아하고, 타인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이들이라고 판단한다. 융의 견해에서 보자면, 전혀 맞지 않은 말이다. 내향화를 하지 않으면 병리적 상황에 빠지게 된다. 마음을 치유하는 것도 내향화를 할 때 이뤄진다. 자신의 안에서 답을 찾는 방식이 치유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시에서 ‘자아의 역사’는 파란만장하다. 이전에도 그랬고 이후로도 그럴 것이다. 여러 삶의 굴곡들이 자아에게 죽비를 내리쳤던 것이다. 그렇게 정신이 번쩍 든 자아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결심했을 때, 자아가 아니라 자아의 그림자가 죽게 되는 것이다. 연이어 자기 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그렇게 마음의 중심을 향해 나갈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다. ‘자기’는 관념이 아니라 살아있는 실체다. 그것을 통합 예술·문화 치유인 ‘심상 시치료’에서는 ‘빛’이라고 한다. 빛과 등 돌려서 사는 삶은 겉으로는 화려하다고 하더라도 안은 텅 비게 된다. 빛 쪽으로 걸어가는 삶은 겉으로 표시가 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아름답고 빛나는 삶이 된다.
라는 골똘하게 듣고 있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자기 실현화가 되어야겠군요. 이 시는 자아에 갇혀있었던 자신의 역사를 쓴 거고요.
맞다. 바로, 그거다. 한번 듣고도 라는 어려운 개념을 잘 이해했다. 라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저도 사실은 자아에 치중해서 살아왔던 것 같아요. 아니, 자기라는 것을 오늘 처음 들었어요. 싫은 것은 누가 뭐래도 싫은데. 그게 다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군요. 평생 원 안으로 못 들어가면, 나는 거만 속에 빠져있겠지요? 얼음의 성안에서 피해자라고 여기며 살고 있겠지요?
그랬다. 내가 그랬으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거였을까? 어떤 표현을 해야 적절한지 모르겠다. 그냥, 자기가 내 안에서 춤을 췄다. 자기 안으로 나를 끌어들였다. 그것을 ‘기적’이라고 하지 않으면 도대체 다른 말로 표현할 도리가 없다.
-저도, 기적이 일어나면 좋겠어요. 아직은 좋은 것은 좋고, 싫은 것은 두 번 다시 보기도 싫어요. 아직도 저는 어머니가 밉고 싫어요. 지긋지긋합니다. 아마도 자아 속에 갇혀있어서 그렇겠지요?
라는 솔직하다. 그런 솔직한 라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말해줬더니 라가 웃었다.
-저한테 늘 칭찬만 하시군요. 저를 나무라실 것 같았는데......
나는 나무랄 수가 없다. 나도 그랬으니까. 라의 나이 때, 나는 엄청난 방황 속에 있었고, 서슴지 않고 일탈을 저질렀다. 나를 함부로 팽개치고 짓밟고 침을 뱉었다. 내가 나한테! 그게 내 자아의 역사였다.
라한테 눈을 감고 복식호흡을 해보자고 했다. 온몸과 마음이 이완되었을 때, 심상으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