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농반진반 May 17. 2023

카지노 앞바다는 회색이었다

미국 자본주의의 막장, 카지노

(미국일기 #18)


처음부터 카지노 때문에 그 호텔을 잡은 건 아니었다.


2박 3일 여행을 계획했다. 멀리 운전하기는 싫었다. 편도 3시간 안쪽이면 적당할 것 같았다. 뉴욕은 가끔 가는 곳이니까 패스. 이번에는 남쪽으로 가볼까. 워싱턴? 5시간 정도 걸린다. 다음에 기차 타고 가자. 잠깐 여기는 어딘가. 케이프 메이. 뉴저지 최 남단에 있는 곶이다. 지도로 보면 영일만 간절곶 같은 느낌이다. 사진빨이 죽인다. 하기는. 사진으로 좋지 않은 곳이 있을까. 그래. 가 보지 뭐.


숙소는 꽤 비싸다. 딸 애를 데리고 모텔에 들어가기는 좀 그렇다. 에어비앤비. 무슨 청소 비용을 이렇게 많이 받나. 거의 숙박비에 육박한다. 청소 비용은 하루를 자도, 일주일을 자도 똑같다. 하루 이틀 숙박에 미국 에어비앤비는 적당하지 않았다. 이 동네는 호텔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다.  


그런데. 여기 호텔은 왜 이렇게 싸지. 3.5성급. 하루 80불이 채 되지 않는다. 애틀랜틱 시티 트로피카나 리조트. 리조트 앞에 카지노라는 말이 붙어 있다. 검색을 해 보니 애틀랜틱 시티는 동부의 라스베이거스라고 불리기도 한단다. 도박의 도시. 잠만 잘 건데 뭐. 카지노건 온천이건 무슨 상관이 있겠나. 그래 자 보지 뭐.


애틀랜틱 시티로 향하는 고속도로에는 카지노를 광고하는 빌보드가 즐비하다. 정선에 놀러 갔다가 카지노에 잠깐 들러서 순식간에 10만 원을 헌금한 적이 있다. 나는 도박에 소질이 없다. 고스톱을 쳐도, 포커를 쳐도, 하다 못해 윷놀이를 해도 대부분 잃는다. 판을 읽는 속도도 느리고, 베팅할 때는 배짱이 없다. 결정적으로 모든 감정이 그대로 표출되는 놀랍도록 맑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노릇이다. 노름을 할 것도 아닌데 애틀랜틱 시티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마음이 살짝 설레었다.


도시 입구를 지나자 호텔로 가는 뒷길이 나왔다. 미국 누아르에서 보던 장면이 펼쳐졌다. 카트를 끌고 다니는 노숙자들. 회색 빛 시멘트. 방치된 폐 건물과 공터. 전혀 예술적이지 않은 그라피티. 카지노 도시의 거리는 카지노와는 달랐다.

어쩐지 쓸쓸한 애틀랜틱 시티 뒷골목. 기분 탓일 수도 있다.


호텔 입구에는 카지노에 숙박을 하는 사람들이 발레파킹을 하려고 길게 줄을 섰다. 평일이고, 그렇게 늦은 시간이 아닌데도 30분을 넘게 기다렸다. 체크인을 하려는 줄도 길었다. 줄 옆에는 셀프 체크인 하는 기계들이 있었다. 이용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고장 났나? 속는 셈 치고 눌러봤는데 잘 작동된다. 미국 사람들은 이런 기계를 싫어한다.


예약자와 카드 주인의 이름이 달라서 살짝 위기가 있었지만 무사히 셀프 체크인을 하고 의기양양하게 객실로 이동했다. 건물이 여러 개라서 천장에 매달린 표지판을 잘 따라가야 했다. 웨스트 윙이 어디 있지? 저기 에스컬레이터를 타야겠는데? 어라 여기는 웨스트윙 표시가 없는데?


프런트에서 객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가는 길은 미로였다. 의도적인 게 분명했다. 미로의 양 옆에는 숙박객들을 유혹하는 파친코 기계가 요란한 음악을 흘리고 있었다. 여기서 길은 쉽게 찾으면 안 된다.


담배 냄새가 지독했다. 곳곳에 금연이라고 쓰여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피우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전동 휠체어를 탄 노인들도 꽤 보였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호텔이라서 그런지 유색 인종이 많았다. 신나게 돌아가는 기계 앞에 앉아 화면을 멍하게 바라보는 사람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알 수 없는 말을 고래고래 내뱉는 사람들. 단체 관광을 왔는지 똑같은 색깔을 옷을 입은 수십 명의 동양인들이 개미처럼 카지노를 누비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우리처럼 방금 도착한 숙박객들이 짐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거대한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거의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대화를 했다.

카지노를 거치지 않으면 객실로 올라갈 수가 없다.


저렴한 객실은 카지노를 위한 미끼에 불과하는 말은 대략 사실인 것 같았다. 20층에서 바라보는 애틀랜틱 시티의 야경은 화려하지만 쓸쓸했다. 와인을 따서 종이컵에 따라 마셨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구경이라도 해 봐야지?


딸아이를 방에 잠깐 놔두고 와이프와 카지노를 한 바퀴 둘러봤다. 정선처럼 신분증을 확인하고, 입장료를 받고, 돈을 칩으로 바꾸는 절차가 없었다. 그냥 들어가서 현금을 사용하면 된다. 게임이 끝나면 정산된 금액이 찍힌 종이를 준다. 그 종이를 어디서나 다시 사용할 수 있고 현금으로 바꿀 수도 있다. 노름하는 사람들에게 최적화된 시스템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한 판 해 봐야지?


기본적인 룰이라도 아는 게임은 블랙잭이 유일했다. 눈치를 보다가 자리에 앉아 20달러를 베팅했다. 마음은 20만 달러를 건 느낌이었다. 퀸. 8. 스테이. 딜러는 9. 7. 6. 버스트. 오호라. 30초 만에 20달러를 벌었다. 한 판 더? 와이프가 팔을 잡아당겼다. 감질맛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객실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카지노에 있었다. 침대에 누우면 천장에서 카드가 돌아갔다. 눈을 감으면 칩이 날아다녔다. 조금 뜸을 들이다 와이프에게 말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 더 해 봐야지 않겠어?


잠깐만 하겠다는 허락을 받고 카지노로 내려갔다. 전장으로 진군하는 장수의 마음이 이랬을까. 지갑에는 현금이 100불이 있었다. 블랙잭 테이블을 찾아가는 길에 슬롯머신 하나에서 큰 배당금이 터졌다. 늙수그레한 남자는 비명을 질러댔고 기계는 안드로메다에서나 나올 것 같은 음향을 내면서 윙윙 돌아갔다. 상관도 없는 내 혈관이 덩달아 팽팽해졌다.


100불. 한꺼번에 잃으면 허무하다. 일단 테이블이 아니라 버추얼로 하는 작은 판으로 시작했다. 5달러 베팅이 가능하다. 승. 패. 승. 승. 승. 패. 패. 승… 초반 승률이 꽤 높았다. 100달러로 시작한 돈이 150달러를 넘어섰다. 아. 나는 전생에 조승우 아니면 아귀였나 보다. 내일 저녁은 더 맛있는 걸로 먹을 수 있겠다. 이번 기회에 테니스 라켓을 바꿔볼까.


거의 200달러까지 갔던 돈이 어느 순간 변곡점을 지나 떨어지기 시작했다. 130달러. 그만할까. 아니다. 그래도 200달러까지는 가보자. 100달러. 이런 이런. 집중하자. 집중하면 승산이 있다. 도박을 하면 뇌에서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한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지는 거다. 50달러. 본전만 찾자. 이길 수 있다. 마지막 5달러. 젠장. 카지노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카지노를 가지 않는 것이라고 했었나.


이렇게 돌아갈 수는 없다. 딸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받지 않았다. 현금 지급기로 가서 60달러를 더 찾았다. 수수료가 8달러나 한다. 이런 도둑놈들. 다시 시작했다. 역시 시작은 좋았다. 60달러로 시작했는데 금세 100달러가 됐다. 그렇지. 돈 찾기를 잘했다. 시간을 봤다. 내려온 지 2시간이 넘었다. 도끼 자루가 이렇게 썩는구나. 상황은 똑같이 흘러갔다. 100달러는 어느새 50달러가 됐고, 다시 5달러가 됐다. 돈을 더 찾아야 하나. 나는 아귀가 아니라 한쪽 손모가지를 잃고도 화툿장을 놓지 못하던 짝귀였나 보구나.   


누가 뒤에서 어깨를 툭툭 친다. 누구… 에구머니나. 와이프였다. 많이 땄어? 응? 아니 아니. 그냥 저냥 구경만 하는 거지. 전화를 안 받아서 내려왔지. 한참 찾았네. 그래? 진동으로 돼 있어서 몰랐네. 가자 가자. 이제 그만해야지. 차마 160달러를 다 잃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애틀랜틱 시티는 명색이 해안도시다. 아침에 일어나 해변으로 나갔다. 호텔 건물을 나가면 바로 바다가 보였다. 해변에는 밤새 노름을 한 것 같은 표정의 흑인들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거리를 보고 있었다. 아무도 바다를 보지 않았다. 백사장의 모래는 거무튀튀한 회색이었다. 황금빛 카지노 호텔 건물과 을씨년스러운 회색 모래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어울렸다. 모래밭에는 갈매기들이 쓰레기를 파먹고 있었다.


모래가 회색이다!

카지노를 비롯한 미국 도박산업의 매출액은 우리나라 전체 예산의 10분의 1에 이른다. 코로나 때도 크게 성장했다. 도박은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고단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벌이는 주요 이벤트다. 황금색으로 도배된 카지노 리조트 안에서 슬롯머신을 쳐다보며 천금을 꿈꾸지만 결국은 회색빛 모래밭으로 나가게 돼 있다. 그리고 고단하게 돈을 벌어 다시 카지노를 찾겠지.


구글 평점이 좋은 베트남 쌀국숫집을 찾아서 아침을 먹었다. 가게는 카지노 손님들로 붐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