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농반진반 Apr 29. 2023

미국 짬뽕과 디아스포라

시간이 멈춘 사람들

(미국일기 #17)


도대체 미국 음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딱 하루, 아니 딱 한 끼면 충분하다. 달고. 짜고. 기름지고. 느끼하고. 양 많고. 결정적으로 맛없고. 넷플릭스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를 보면 파리 사람들이 시카고 피자 같은 미국 음식을 ‘쓰레기’라고 비웃는 장면이 있다. 재수 없는 말투였지만 깊이 공감한다. 여기 음식은 그냥 비싼 쓰레기라고 보면 얼추 맞다. (물론 나는 쓰레기도 잘 먹는다.)


맛도 맛이지만, 물가를 고려하면 집에서 직접 해 먹는 게 상수다. 다행히 자취 생활 10년, 결혼 생활 20년. 맛이 있든 없든 못 하는 건 없다. 홈쿡의 첫걸음은 식자재 조달. 다행히 미국은 마트가 참 다양하다. 월마트부터 코스트코, 홀푸트마켓, 웨그너스, 맥캐프리. 천조국의 마트는 진정 풍요로운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규모는 압도적이고 상품의 종류와 양은 어디나 지나치다.  


그럼 그렇지. 파도 있고, 양파도 있고, 마늘도 있고, 감자도 있다. 파는 대파와 쪽파 중간쯤 되는 사이즈인데 그런대로 쓸만하다. 마늘은 6쪽이 아니라 20쪽쯤 되는 되는 거 같다. 손이 많이 가지만 맛은 비슷하다. 양파와 감자는 왜 이렇게 종류가 많은 것인가. 산더미 같은 채소 매대 앞에서 길을 잃을 지경이다.


바이 더 웨이.


없는 게 있다. 고등어조림에 들어갈 무가 보이지 않는다. 겉절이를 담그려면 배추가 필요한데 찾을 수가 없다. 이 미개한 나라의 시민들은 순두부를 먹지 않는다. 콩나물은 어디 있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청양고추. 이게 없으면 말짱 헛일이다. 청양고추 없이 어떻게 찌개를 끓일 수 있단 말인가.


다행히 한인들을 타깃으로 하는 마트가 있다. 가까이는 WooRi마트가 있고 차 타고 30분만 가면 그 유명한 H마트도 있다. 한아름 마트다. <H마트에서 울다>라는 책이 있다. 한인 2세가 쓴 에세이집이다. 처음 H마트에 갔을 때 나도 울컥했다. 초코파이, 죠리퐁, 새우깡, 신짱. 아. 나의 페이보릿 초코송이. 비비고, 청정원, 동원, 펭귄. 샘표. 여기는 이마트인가 GS마트인가. 콩나물, 고사리, 배추, 무. 한국인이 원하는 모든 것들이 구비돼 있다. 직원들도 한국인이 많다. 웨어 이스 슈가 누들? (당면은 어디에 있어요?) 웨어 이스 라쿤 라멘? (너구리를 못 찾겠어요.) 말도 안 되는 영어로 어렵게 물어보니까 한국어로 대답한다. 잠시만요. ‘잠시만요’가 이렇게 감동적인 단어인지 몰랐다.


하우에버.


여기에도 청양고추가 없는 것이었다. 멕시코 고추라고 할 수 있는 할라피뇨를 써 볼까. 불경스럽다. 청양고추 대신 매운 고춧가루를 사용했다. 맵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맑은 매운맛이 아니다. 보드카가 결코 소주를 대체할 수는 없다. 한없이 투명하지만 혀에 닿으면 컬러풀하게 느껴지는 알싸한 국물을 나는 원한다. 청양고추를 키워야 하나. 씨앗을 한국에서 들여올 수 있는지 검색을 해 봤다. 이렇게 나는 21세기 문익점이 되는 건가.


원 데이.


에세이 <H마트에서 울다>의 실제 배경은 필라델피아였다. 거기에는 푸드코트가 있고, 온갖 한국 음식을 판다는 대목을 읽고 바로 출발했다. 우리 동네 H마트가 한국풍과 중국류가 섞인 연변 느낌이라면 필라델피아 H마트는 명동의 냄새가 났다. 더 완벽하게 한국식이었다. 한국에서 슬리퍼 끌고 다녔던 365마트에 온 것 같은 편안함. H마트는 마켓이 아니라 고향이었다.


채소 코너 지나다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LED 조명 아래 초록빛이 살짝 반사돼 눈동자를 간지럽혔다. 한쪽으로 몸을 살짝 꼰 완벽한 자태. 그립고 그리웠던 향기가 투명한 랩을 뚫고 나올 것 같았다. 네 이놈. 어디 갔다 이제 나타난 것이냐. 그렇게 금보다 귀하다는 청양고추를 발견했다. 이제 된장찌개는 얼큰해질 것이며, 앞으로 제육볶음은 칼칼해지리라.


아리따운 청양고추의 자태. 심봤다를 외치고 싶었다.


H마트 푸드코트는 꽤 넓었다. 돼지 불백, 설렁탕, 김치찜, 김밥, 떡볶이, 그리고 짜장과 짬뽕. 먹고 싶은 음식이 다 모여 있구나. 자주 오지 않는 기회를 120% 살려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으로 메뉴 선택에 신중을 기했다. 온 가족이 이렇게 진지할 때가 있었을까. 결국 딸아이의 기호 대로 짬뽕과 탕수육을 시켰다. (논의는 무의미하다.)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도 길게 느껴졌지만 기다림마저 달콤했다. 대부분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물론 중국인도 있고, 서양인들도 보였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익숙한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이민자들. 이미 미국 사람이 돼 버린 아들과 딸에게 한국 음식을 먹이는 노인들. 한국 음식을 입에 넣는 표정은 행복해 보였다.


파이널리.


짬뽕과 탕수육이 나왔다. 공깃밥에 하나 따라 나왔는데, 놀랍게도 짬뽕이 아니라 탕수육과 세트였다. 어쨌든 나는 짬뽕이 급했다. 빨간 국물. 숟가락 따위를 쓸 수는 없다. 그릇째 들이켰다. 캬! 캬? 응? 잠깐. 이건 뭐지. 한국에서 먹던 짬뽕 특유의 칼칼함이 아니었다. 맛이 없는 건 아닌데 다르다. 목을 타격하는 매운맛이 아니라 고춧가루 넣은 오징어국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낯설지는 않았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다. 생각할 시간이 없다. 허겁지겁 면을 밀어 넣고 국물을 마셨다.


그릇을 비워갈 무렵 마음이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떠올랐다. 이 짬뽕은 어릴 때 먹던 그 맛이었다. 40년 전? 30년 전? 모르겠다. 요즘은 이런 짬뽕 맛을 내는 중국집이 드물다. 뭐가 더 맛있냐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음식이다.


푸드코트에서 중국음식 코너를 운영하는 사람들도 한국인인 것 같았다. 연배를 보니 적어도 60대 이상. 아마 이민 온 지 2-30년은 지났을 거다. 한국에서 중국집을 한 적이 있었겠지. 그때 그 맛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거다. 정작 한국에서는 사람들의 입맛이 빠르게 변한 지 오래다. 한국 음식의 맛은 10년 전, 20년 전과 매우 달라졌다. 하지만 여기 미국의 한인 사회는 수십 년 전 그대로다.


한국인이 본격적으로 미국 이민을 시작한 시기를 1980년대로 본다. 통계마다 차이가 있지만 지금은 대략 200만 명에 이른다. 절반 정도는 미국에서 태어났다. 사람들마다 성향이 다르고 세대가 바뀌면서 변화가 있었겠지만, 한인 사회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잘 섞이지 않(못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들 한다. 생활은 미국에서 하지만 한국 사회에 대한 소속감이 아직도 강력하다는 말이다. 미국의 한인 타운을 한국에 소속된 한 도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누군가는 말했다.  하지만 정작 실제 한국 사회와는 태평양의 폭만큼이나 다르다. 미국인이지만 한국인인 이중적인 정체성. 한국인이라지만 한국인은 또 아닌 어정쩡한 거리감. 미국에 살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 디아스포라.


물론 나는 이런 얘기는 주워 들었을 뿐 실제로 겪어보지 못했다. 한인 사회의 실재 모습이 어떠한지는 차차 알게 될 거다. 하지만 H마트에서 먹은 짬뽕은 딱 그랬다. 어린 시절 먹었던 맛을 떠올리게 하지만 맛있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짬뽕. 푸드코트 곳곳에는 한국에서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글 폰트들이 가득하다. 정겹지만 어색하다.


H마트 푸드코드에는 쇠 숟가락이 없다. 옆 테이블에 경상도 사투리를 진하게 쓰는 노인이 선글라스를 끼고 하얀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설렁탕을 입에 넣는다.


뜨거운 돌솥비빔밥을 저 연약한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비벼야 하다니.


이전 11화 아이들 5명이 매일 총 맞아 죽는 나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