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스의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다. 앞 뒤로 아무 차도 없으니 나에게 보내는 신호임에 분명하다. 젠장. 잠깐 딴생각을 했다. 제한 속도가 얼마였더라. 꽤 속도를 냈던 것 같다. 차를 세웠다. 배가 산만한 경찰이 미드의 한 장면처럼 걸어와 면허증을 요구했다. 경찰은 오른손으로 허리띠에 달린 권총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아직 면허증이 없다. 시험에는 합격했지만 도착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가져온 국제면허가 어디 있더라. 가방에 있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권도 집에 있다. 분실할까 봐 서랍장 깊숙이 숨겨놨다. 면허증이 없으면 무면허로 처리되는 거 아닐까. 경찰서에 연행되는 건가. 차는 어떻게 하지. 견인되는 건가. 수갑을 차고, 묵비권을 행사하고, 변호사를 불러야 할까. 변호사 비용은 얼마나 들까.
짧은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더듬더듬 영어로 상황을 설명했다. 얼마 전에 이민을 왔다. 아직 면허가 없다. 가방 안에 한국에서 가져온 국제면허가 있을 거다. 핸들 위에 올려놓은 손이 달달달 떨렸다. 날도 흐린데 선글라스를 낀 경찰은 표정이 없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는 가방을 뒤졌다.
노. 돈 무브.
경찰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재빨리 총을 꺼내서 나를 겨눴다.
아임 쏘리. 아이 해브 낫씽. 아이 엠 낫씽.
물론 상상이지만 미국에서 처음에 운전을 할 때 이런 상황을 떠올리곤 했다. (은근히 기대했을 수도 있겠다.) 한국에서 꽤나 거칠게 차를 몰았던 나는 뉴저지에서 병아리처럼 조심조심 운전을 했다. 모든 신호를 철저하게 지켰으며, 우회전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미국은 우회전에 대해서 한국보다 엄격하다.) 속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어디에도 과속 카메라는 없었지만 속도를 엄격하게 준수했다.
운전하기는 한국보다 수월했다. 과속을 하거나 험하게 운전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뒤에서 빨리 가라고 빵빵거리는 차는 만나기 힘들었다. 대부분 여유가 있었다. 신호가 없는 사거리에서 서로 양보를 하느라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는 경우를 자주 봤다. (물론 뉴욕에 한번 가본 뒤 알게 됐다. 여기가 시골이라서 그런 거였다.)
미국의 도로에는 강박적일 정도로 제한 속도 표지판이 많이 붙어 있다. 차도 없고 사람도 없는 숲 속 한적한 도로에는 45. 근처에 학교라도 있으면 25가 많았다. 느림보 곰탱이들만 운전하는 나라인가. 한국에서는 민식이 법에서조차 30이다. 실제 미국은 영화 ‘분노의 질주’의 나라가 아니었다.
물론 이 숫자들이 킬로미터가 아니라 마일(MPH, Mile Per Hour)이라는 사실은 금방 깨달았다. 문제는 숫자가 의미하는 ‘량’이 정확하게 얼마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제한 속도가 55마일이라면 정확히 몇 킬로를 의미하는 걸까. 내 핸드폰에는 단위를 환산하는 앱이 깔려 있지만 운전을 하다가 계산기를 두드릴 수는 없는 일이다. (궁금증보다 경찰이 더 무섭다.)
내비게이션에서는 1000 피트 앞에서 우회전하라, 800피트 앞에서 좌회전하라고 지시한다. 피트는 또 뭔가. 마일보다 작은 단위가 피트라면 1000 피트가 1마일쯤 되지 않을까. 아니다. 그럼 3000피트가 1마일? 아니다. 미국 사람들한테 1피트가 몇 마일이냐고 묻는다면 계산기 없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없다.
미국을 포함한 우리가 쓰는 수는 10진법이다. 미터법은 10진법이다. 1미터는 100센티고 1000미터는 1킬로다. 단순하고 아름답다. 그래. 너희들은 나름의 단위를 쓰고 있다고 해보자. 그럼 거기에도 ‘단순하고 아름다운’ 체계가 있어야 하지 않나. 12인치, 22야드, 8펄롱은 도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길이는 그래도 양반이다. 마트에서 과일을 좀 사려고 했더니 이상한 말이 적혀 있다. lb? 아이비? 엘비? 누구냐 넌. lb 당 2달러, 3달러 이렇게 적혀 있으니 무게인 것 같다. 사전을 찾아보니 파운드란다. 아니 파운드면 p라고 하던가 pd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호옥시 파운드는 f인가?
lb는 로마에서 왔다고 한다. 453.592그램쯤 된단다. 오케이. 알겠다. 싫지만 이해한다. 대략 500그램, 좀 안 되는구나. 접수. 그런데 파운드 아들쯤 되는 oz는 또 뭐냐. 온스? 그렇다면 10분의 1파운드? 노노. 그렇게 쉬운 나라가 아니다. 16분의 1파운드 되시겠다.
처음에는 1개에 2.89 달러인 줄 알았다.
여기에 부피가 들어가면 거의 암호 해독 수준이 된다. 배스킨라빈스에서 보던 파인트는 568밀리리터쯤 되는데, 20온스에 해당한다. 여기서 온스는 질량의 단위인 온스와는 약간 다른 놈이란다. 파인트가 8개면 갤런이 된다. 갤런이 42개 모이면 배럴이 된다. 기름값이 올랐다 어쩌구 하는 뉴스를 보면 1배럴에 몇 달러 이러는데, 여기서 배럴이 나온다.
미국에서도 우리나라처럼 주유소 앞에 가격을 대문짝 만하게 써붙여 놓는다. 요즘은 3.3달러 정도 한다. 4천 원이 넘는다. 처음에는 미국이 기름이 싸다고 하더니 말짱 헛소리였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는 리터가 아니라 갤런으로 기름을 판다. 1갤런은 3.785리터. 계산기를 두드리면 리터당 얼마인지는 알 수 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가능하다. 그런데 자동차 연비는 MPG이다. 갤런 당 몇 마일 달릴 수 있냐로 나온다. 마일은 킬로미터로, 갤런은 리터로 바꿀까. 됐다. 그냥 넘어가자.
넓이도 있는데 이건 제곱이 들어가니까 스퀘어 피트, 이런 식으로 표기된다. 여기서부터는 나 같은 보통 사람의 감각을 넘어선다. 평과 제곱미터도 힘들었는데, 이건 포기다.
미국에서 쓰는 도량형들은 대부분 유럽에서 만들어진 옛날 단위들이다. 한국에서도 길이로 한 자, 두 자, 무게로 한 근, 두 근, 부피로 한 되, 두 되 하는 단위를 아직도 가끔 쓴다. 그런데 미국은 이 복잡한 옛날 단위를 ‘공식적으로’ 아직 쓰고 있다.
구글에서 찾아보니 미국에서도 도량형을 미터법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시민(?)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미국 도량형을 바꾸는 데 성공하면 노벨물리학상을 받을 거라는 농담도 있다.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줄여주기 때문에 의학상을 받을 거라는 후속편도 있다.
한국은 갑오개혁 때부터 도량형 통일을 시작했고, 1964년에 강제적이고 전면적으로 미터법을 시행했다. 프랑스는 18세기 말 혁명 때 도입했고, 일본도 19세기말에 시작했다. 영국마저 공식적으로 미터법을 쓰고 있다. 그런데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이 영국의 단위를 고집하고 있다는 건 우리가 보기에는 아이러니한 일이다.
1999년 미국 우주선이 화성에서 사고가 났다. 도량형 때문에 착오가 생긴 게 원인이었다. 손해액만 천억 원이 넘었다. 미국에는 약을 과도하게 복용해서 병원에 가는 아동이 꽤 많다고 한다. 단위가 복잡한 것이 큰 이유 중 하나라고 추정된다. 미국에서 물건을 만들어 해외로 파는 사람들의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닐 거다.
그래도 미국은 바꾸지 않는다.
길을 한번 내면 그 길이 좀 불편해도 새로운 길을 만들지 않는다. 익숙함은 불편함을 상쇄한다. 추가로 들어가는 비용도 크다. 경로의존성이라고 한다. 미국 도로에 있는 모든 표지판을 마일에서 킬로미터로 바꾸는 게 가능하기나 할지 모르겠다. 물론 경로의존성 때문만은 아닐 거다. 최대 최강대국이 뭐가 아쉽겠나. 제국은 경로를 스스로 바꾸지 않는 법이다.
밤에 추워서 잠이 깼다. 보일러 온도가 70도로 맞춰져 있다. 뭐야. 고장인가. 화씨였다. 아침에 일기예보를 보면 온도가 30도인데 눈이 내린다. 섭씨로는 영하였다. 숫자가 만들어 주는 감각이라는 게 있다. 리니어한 명확한 감각이다. 여기서는 계산기를 두드려서 단위를 변환해야 정확한 감각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내가 이곳에 몇 년을 살면 화씨 숫자에 감각이라는 것이 생길까. 거대한 나라의 경로의존성도 강력하겠지만, 개인의 마음속 경로의존성도 복잡하고 다단하다. 시간이 꽤 흐른 뒤에도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