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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반진반 Mar 31. 2023

아이들 5명이 매일 총 맞아 죽는 나라

군복 입은 '성조기 할배'에게 놀라다

(미국일기 #13)


아침 식사 준비는 힘들지는 않지만 언제나 고민이다. 매일 메뉴를 바꿔주지 않으면 따님께서 무척 싫어하신다. 과일과 우유를 기본으로 깔고, 씨리얼, 핫케익, 프렌치토스트, 만두, 새우죽 정도를 매일 돌린다. 오늘은 뭘 먹나. 만사가 귀찮다. 씨리얼로 가자. 싱크대에서 복숭아를 자르면서 또박또박 크게 외쳤다.  


“ALEXA! PLAY THE CNN NEWS BRIEFING.”

 

영어로 시작하는 아침은 보람차고 상쾌...할 리가 있나. 억지로 들어 본다. 언젠가 귀가 뚫리겠지. 자칭 AI 스피커는 활기찬 목소리로 뉴스를 재생한다.


“THIS IS CBS NEWS.”


왓 더. 이놈에 AI 스피커는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ALEXA. STOP. ALEXA. PLAY THE C/N/N NEWS BRIEFING.”


알렉사는 몇 번을 CBS 뉴스를 재생하다가 결국 고집을 꺾고 CNN을 틀었다. CBS나 CNN이나 잘 알아듣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CNN 기자 목소리가 더 낭랑하다. 배경으로 틀어 놓는 클래식 음악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


오늘따라 익숙한 단어 몇 개가 귀에 꽂혔다. 스쿨? 슈팅? 엘리멘트리? 데드? 말로만 듣던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CNN 기자의 목소리는 약간 흥분돼 있었다. 복숭아를 내려놓고 핸드폰으로 구글링을 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남의 일이었는데, 여기서 들으니까 내 일이 된다. 미국 땅이 넓다고 하나 혹시 이 동네가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School. shooting. dead. 관련 기사가 주르륵 올라왔다. 테네시주 내슈빌. 맵에서 테네시주를 찾아봤다. 꽤 먼 곳이었다.


3월 28일 오전 10시쯤. 내슈빌 한 사립초등학교에 20대 여성이 침입해 총기를 난사했다. 9살짜리 3명과 교장을 비롯한 직원 3명이 숨졌다. 범인은 총을 합법적으로 구입했으며, 정신과 치료를 받은 경력이 있다.


하루에 아이들 5명이 총 맞아 죽는 나라


사건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궁금해서 찾아본 총기 관련 미국 통계는 경악이었다. 4명 이상이 죽거나 다친 사건을 총기 난사(Mass Shootings)라고 하는데 올해 들어 132건이 발생했다. (출처 : https://www.gunviolencearchive.org/) 그런데. 지금이 겨우 3월이다. 한 달에 약 40건. 하루에 한 번 이상 미국 어디선가, 누군가, 누구에게, 총기를 난사한다는 거다.


그럼 총기 관련 사망자는 몇 명일까. 2020년 기준으로 45,222명이 숨졌다. 하루에 124명이 죽는다. 15분마다 한 명씩 총기로 사라진다는 말이다. 반은 자살이고 반은 살인이다. 우리나라에서 1년 동안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이 2021년 기준으로 2,916명이다. 미국 총기 사망자가 15배가 넘는다. 인구를 감안해도 너무 많다.


끝난 게 아니다. 가장 놀라운 건 아이들 희생자 숫자다. 2023년 석 달 동안 총기로 숨진 미성년자( 17세 이하)가 417명이다. 하루 다섯 명의 아이들이 죽는다. 다친 아이들은 벌써 천 명이 넘었다.


미국은 총기와 관련해서 명백하게 ‘후진국’이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말이 있다. 이게 나라인가. 여기 정부라는 것이 있는가. 우리 같으면 벌써 대규모 폭동이라도 일어났을 거다. 어떤 정권이라도 온전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미국은 변하지 않는다.


총기 난사가 ‘마음의 문제”라고?


딸아이를 학교에 보내 놓고 오랜만에 TV를 틀어서 뉴스 채널을 돌려봤다. 추모 행사, 수사 속보, 전문가 인터뷰. 한국 언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익숙한 뉴스들이다.


폭스뉴스에서는 전직 CIA 출신이라는 아저씨를 섭외한 모양이다. 이상한 군복 같은 걸 입고 사회자에게 거수경례를 하는 폼이 범상치 않다. 한국 덕수궁 앞에서 많이 본 모습이다. 미국은 이런 사람을 TV 뉴스에서도 볼 수 있구나.

폭스뉴스에 출연한 전직 CIA 출신 성조기 할배는 피부가 매우 좋았다. 하지만...


외모도 범상치 않았던 이 양반의 주장은 더욱 상식을 벗어나 안드로메다를 떠돌았다. 영어가 짧지만 대략 이러한 내용이었다.


►총기사고는 총기의 문제가 아니다. 마음의 문제a heart problem이다. (설마 심장 문제는 아니겠지) 멘탈 헬스the mental health에 집중해야 한다.  

►경찰은 멀리 있다. 무기가 없어도 도망가지 말고 우리 모두 말벌hornet처럼 한꺼번에 공격하면 살상범을 제압할 수 있다you will take him down.

►매을 아껴서 아이들을 망쳤다spare the rod spoil the child. 아이들이 더 이상 선생님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ROTC 프로그램을 유치원까지 확대해야 한다. 질서 있고 강한 나라a stronger nation를 만들자.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주옥같아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한숨을 쉬고, 욕설을 뱉다가, 결국 구역질을 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분이었다.  


폭스가 이런 인터뷰를 하는 의도야 뻔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정신을 가진 사람을 섭외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진행자는 마지막에 훌륭한 관점great sight라고 성조기 할배를 추켜세웠다. 진심일까. 비꼬는 말일까. 이 나라는 막장도 스케일이 달랐다. (적어도 이런 부분에서는) TV조선은 폭스에 비하면 점잖은 양반일지도 모른다.


총기 사건과 관련이 없지만 이런 뉴스도 있었다. 아칸소에서 소셜미디어가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소송을 벌인다는 소식이었다. 메타와 틱톡이 소송 대상이었다. 그래. 이런 게 미국 아닌가.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다소 무리하더라엄격한 규율을 마련하고 철저하게 지키는 게 미국 아니었다.


초등생 아이들과 선생님이 학교에서 여섯 명이 죽었는데, 아니 전국적으로 하루에 다섯 명씩 죽어 나가고 있는데. 더구나 이번 범인은 총기를 합법적으로 샀다고 하는데. 무슨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총기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과, 운동과, 소송이 빗발쳐야 하는 거 아닌가. 나라가 발칵 뒤집혀야 정상 아닌가. 저 빡빡이 아저씨 말처럼 벌떼처럼 일어나 (살상범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총기 규제 강화하라는 시위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거다.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한다. 서부 개척(!) 시대부터 만들어진 총기에 대한 미국의 독특한 정서라고. 다 개소리다. 미국에서 총기의 역사적 맥락이 아무리 복잡하다고 하지만, 눈앞에서 아이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건 다 개소리다. 참 이해할 수 없는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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