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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반진반 Mar 05. 2023

미국에서 벼락부자가 되다

뜻하지 않게 성공적인 재테크

(미국일기 #9 (물가 편 3)/ 앞에서 이어집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새로운 물건을 사는 걸 극도로 저어하게 됐다. 현재 스코어 가장 애정하는 자주색 가을 재킷은 2006년쯤이었나 일하던 부서에서 단체로 맞춘 등산 잠바다. (하나밖에 없지만) 역시 애정하는 등산화는 2002년 부산 근무할 때 샀으니 만 20년이 넘었다. 그동안 밑창을 두 번 갈았는데 모두 공짜로 해 줬다. 트렉스타 짱이다.


10년 입은 청바지가 여기저기 해지고 찢어지기 시작했다. 꿰매 입고 다녔다. 사람들은 내가 일부러 찢었다고 생각했다. 오 멋진데. 하면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분수에 맞지 않게 힙한 옷을 입고 다니는 놈이 돼 버렸다. 결국 엉덩이 쪽이 찢어졌다. 속옷이 보였다. 도저히 입을 수가 없게 됐다. 버리지 못하고 서랍에 넣어 놨다.


자동차도 폐차 직전까지 탔다. 낡은 창문이 고장 나서 올라가지 않은 적이 있었다. 돈 주고 고치기도 아까운 똥차였다. 박스 테이프로 대충 붙이고 다녔다. 비가 오면 물이 샜다. 우연히 내 차를 본 취재원이 요즘 보기 드문 '청렴 검소한 기자님'이라고 감동하는 일도 벌어졌다.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내가 절약 정신이 투철하거나 옛 성현들처럼 가난함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변태는 아니다. 그저 새로운 뭔가를 사는 게 귀찮고 싫을 뿐이다. 내가 검소하지 않다는 건 술을 같이 마셔 보면 안다. 술값은 거의 유일하게 내가 돈을 아끼지 않는 분야다. 2차를 가고 3차를 가면 기분이 좋아진다. 기분이 좋아지면 더 술을 마신다. 좋은 술, 비싼 술 마다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내 용돈의 90%는 밥값, 안줏값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밖에서 술을 함께 마실 사람도, 기회도 거의 없다. 여전히 와인 한 병 사면 집에서도 하루를 못 가지만 그래봤자 10달러 20달러다. 한국에서 용돈의 90%가 술값이었다는 뜻은, 미국에서는 10%만 쓰면 생활이 된다는 말이다. 뜻하지 않은 횡재다.


미국에 온 지 두 달이 됐다. 가계부를 쓴다. 이상하다. 나가는 돈이 생각보다 적다. 사람 잡는 월세에, 미친 외식비에, 손 떨리는 장바구니 물가인데? 왜 지출이 생각보다 많지 않을까. 진짜 내가 술을 덜 마셔서 그런가.   


한국에서의 지출과 비교해 봤다.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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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다. 안 끝났다.) 해답은 사교육이었다.


딸내미는 한국에서 중2까지 다녔다. 성적에 큰 욕심이 있지는 않았지만 사교육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다른 아이들이 다 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래서 학원을 가지 않으면 같이 놀 친구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길고 긴 방과 후를 학원으로 때우지 않으면 방법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막연한 불안감이었다. 굳이 선행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2년 3년 선행을 하는 주위 아이들을 보면서 한 학기 선행이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했다.


맞벌이 부모의 아이는 매일매일 학원 뺑뺑이를 타야 한다. 딸아이도 영어 학원에, 논술 학원에, 수학 공부방에 쳇바퀴를 돌았다. 피곤해하는 아이에게 학원 안 다녀도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아이가 학원을 더 원했다. 크게 비싼 학원과 공부방은 아니었지만 세 개, 네 개 쌓이면 백만 원을 훌쩍 넘게 된다.


미국에 와서 그게 사라졌다. 학교에서 오케스트라 수업을 필수로 해야 하는데 피아노 말고는 할 줄 아는 악기가 없었다. 멍 때리고 있으라고 할 수는 없어서 바이올린 교습을 일주일에 한 번 끊어 줬다. 그게 전부다. 다른 학원에 다닐 유인이 없어졌다. 막연한 불안감이 사라졌다. 직장을 그만둔 아빠 책이 안 팔려서 미국에서 가난해졌을지는 모르지만 아이는 시간 부자가 됐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상쇄하는 재테크다.


교육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그건 나중에 하고 다시 돈 문제로 돌아오자. 엄살을 부렸지만 미국도 싼 게 꽤 있다. 한국에서는 테니스장을 예약하려고 꼭두새벽에 일어나 광클을 하곤 했다. 그렇게 귀하던 테니스장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잠겨 있지도 않다. 그냥 가서 치면 된다. (아직은 치지 않지만) 골프장도 한국과 비교하면 공짜에 가깝다. 5분만 나가면 국립공원 뺨치는 트레일이 지천이다. 여기저기 공연을 볼 수 있는 극장도 참 많다. 연극과 연주회가 넘쳐난다. 그리고 싸다. 공짜도 많다. 미술관도 박물관도 많다. 지역 도서관을 통하면 공짜로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미국 식당에서는, 미국 시장에서는 그런 생각이 안 드는데, 미국 호숫가 산책로를 걸으면 진짜 부자가 된 것 같다. 12면짜리 넓고 넓은 테니스장에서 혼자 벽치기를 하면 내가 바로 만수르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만족감인지 안도감인지 질투인지 시샘인지 모를 감정이 복잡하다.


복잡한 생각은 나중에 따로 하고, 단순하게 따져보자. 현재 스코어. 나는 벼락거지인가 벼락부자인가.


미국의 자연을 보면 부자가 된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질투심이 올라온다.


우리 동네는 시골이라서 지하철도 없고, 택시도 없다. 버스는 있는데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배차 간격도 길고 노선도 듬성듬성이다.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는 사람은 당연히 드물다. 자가용을 참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낮에 차가 없다. 불편하다. 우버는 너무 비싸다. 라면 사러 우버 타고 왔다 갔다 하면 5만 원은 우습다. 라면 봉지보다 수프 봉지가 큰 꼴이다. 하지만 아무리 바쁜 일이 없는 백수라도 조선 시대도 아니고 라면 사러 왕복 세 시간을 걸어 다닐 수는 없다. 갈 데가 있어도 잘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싸구려 자전거를 한 대 샀다. 세상에 이렇게 기동성이 좋아지다니. 세상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비고 다닌다. 어쩔 수 없이 교통비가 들지 않는다. 뜻하지 않게 운동도 되고 밥도 맛있다. 이런 어쩌지. 건강까지 좋아진다. 사는 게 그런 거 아닌가. (물가 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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